동짓날과 동지팥죽
이름     관리자 날짜     2014-10-06 14:09:54 조회     2015

동짓날과 동지팥죽




오늘은 동지입니다. 동지(冬至)는 글자 그대로 ‘겨울(冬)이 극진한 데까지 이르렀다(至)’는 뜻으로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며 24절기 중의 하나로 스물 두 번째 절기이며 대설의 다음이고 소한의 앞이 됩니다. 음력으로는 11월 중기(中氣)이고, 양력으로는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冬至線 : 南回歸線)과 황경(黃經) 270도에 도달하는 날을 가리키는데 이는 양력 날짜로 대략 12월 21일에서 23일경이 됩니다.




동지가 음력 11월 초순(1일부터 10일)에 들면 애동지라 하고 중순(11일부터 20일)에 들면 중동지, 하순(21일부터 말일)에 들면 노동지라 합니다. 애동지가 들면 팥죽을 쑤어먹지 않고 팥고물을 얹은 떡을 해서 먹습니다.




동짓날은 음의 기운이 극에 이른 상태로 음극즉 양생(陰極則 陽生)이라 하여 동지를 기점으로 처음 양의 기운이 탄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고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다 합니다.




또한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기운을 회복(回復)하는 날이라 여겨 경사스러운 속절로 삼았으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여 동지를 일년의 시작으로 생각하였고 민간에서는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유래에 대해《형초세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 요순시대에 형벌을 담당하던 공공씨(公共氏)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망나니 자식이 있었는데, 늘 말썽을 부리고 부모의 속을 썩였는데 워낙 말썽이 심한지라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역질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역질이 마을에 돌면 병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었다. 이에 노한 공공은 비록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생전에 아들이 붉은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다. 그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지고,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먹었다.]




동짓날 팥죽을 먹는 유래에 대하여 불가(佛家)에서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다. 어느 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며 내년에는 벼를 심으라 하였는데 과연 그 해에 벼가 풍년이 들어 많은 수확을 거두었고, 또 다른 해에는 고추를 심으라 하였는데 그 또한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 해마다 심어야 할 농작물을 일러 주었으며 그 때마다 농사가 잘 되어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었고 그 선비는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지곤 했다.




세월이 지나자 선비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날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 하였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 하였는데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그 피를 뿌렸더니 그 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쑤어먹는 유래기 되었다.]




전설이야 그렇다 치고 사실에 근거한 팥죽의 유래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의 유래는 음양사상(陰陽思想)에서 유래된 것으로 즉 팥은 붉은 색을 띠므로 '양(陽)'을 상징하는데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는 양을 싫어하므로 이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귀신이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일년을 시작하는 성스러운 날에 잡귀가 붙는 것을 막기 위해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대문앞과 벽에 팥죽을 발라 주는 것입니다.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식수인 우물에 잡신이 붙어 전염병이 생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동짓날 팥죽을 먹을 때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동지시각에 정확하게 맞추어서 숟가락을 들어야지 동지시각에 맞추지 않고 먹는 동지팥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며 꼭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또 동지팥죽을 쑬 때에도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우선 팥죽을 쑤면서 집안에 냄새가 배이도록 하고, 팥죽은 먼저 신명계의 어른께서 드실 것이기에 맛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지팥죽을 먹기 전 먼저 사당에서 조상께 팥죽을 올리고 동지제례를 지내는데, 명절날 차례와 같이 지내면 됩니다. 동지시각 전에 동쪽으로 팥죽을 큰 그릇으로 한 그릇 놓고 반찬도 놓아 상을 차려놓고 기다려, 동지시각 5분전쯤에 남쪽으로 네번 절하고, 서쪽으로 네 번 절하고, 동쪽으로 일곱 번 절한 뒤 정확한 동지시각에 팥죽을 먹으면 그 해 운수는 대통하게 된다고 전해옵니다.







동지는 일양시생지일(一陽始生之日)이라 하여 음이 다하여 양의 기운이 비로소 시작되는 날이요, 원화소복(遠禍召福)이라 하여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날이기에 예부터 여러 풍습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동짓날 새 버선을 신고 이 날부터 길어지는 해 그림자를 밟고 살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장수를 비는 의미로 며느리들이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의 기혼녀들에게 버선을 지어 바쳤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동지 무렵이면 관상감(觀象監)에서 왕에게 새해의 달력을 만들어 바쳤고, 이를 받은 왕은 신하들에게 달력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이런 풍속을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 하여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부릅니다.




한편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11월 조에는 동짓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