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형을 생각하며(2부)
이름     법무사 김춘근 날짜     2022-02-25 13:04:33 조회     309

나훈아 !

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 이 시점에서 되묻고 싶다.

아니 그의 무례(?)하기까지 할 정도의 오만(?)과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내재된 음악적 정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는 언제인가 모 재벌 회사의 파티에 와서 노래를 불러 달라는 청을

받고 무안할 정도로 거절한 적이 있다.

정치에 나와 달라는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북한 공연과 관련하여서도 북에서 시키는대로 꼭두각시 공연을 할  수는

없다며 두 차례에 걸쳐서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방북을 거절하였다.

수백억의 돈을 들여 그가 태어난 고향 부산 초량동에 박물관을 짓고 

물레방아를 만들고 초량천을 관광벨트로 개발하자는 정부의 제의를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아직 현역인데 무슨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며

거절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국에 걸쳐 산재되어 있는 그의 노래비

를 건립하는데에도 한번도 참가하거나 후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는 공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대중가수는 그저 흘러가는 가수이다,

흘러가면 잊혀져 가는 것이고 그것으로 서운할 것도 없다" 고

단순히 별난 성격의 소유자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모든 것을

초월한 인생철학이 돋보이는 것이 필자의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훈장 수여 등과 관련하여도 가수는 창작을 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야 하는데 훈장의 무게가 무겁다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니 정치와 방송권력에 휘둘리

지 않아서인지 웬만한 연예인들이 다 받은 훈장 하나도 없고 수상 경력이

별로 없다.

수상과 관련하여 역사적 사실 하나가 필자의 뇌리에 스친다.

노벨상 시대에 톨스토이와 간디가 노벨상 수상 경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대문호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인류의 성자

가 되었다. 훗날 역사가 헌정한 가장 위대하고 정직한 월계관을 수여 받은

것이 아닐까 ! 또 한 사람 있다. 1965년도에 장 폴 사르트르도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비교나 예시의 대상이 아닐지 모르나 나훈아 역시도 가수 나훈아

족하지 수상경력과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싶다. 모든 분야에서의

수상이라는 것이 본질을 외면한 선례가 수없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수상과 관련하여서는 과거 아픈 추억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아니 이번에 등장하면서도 일체의 언론과

방송을 회피했고 등한시했던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언론과 방송의

이중성과 아전인수식 야비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결코라고 할 정도로 단순한 가수, 그런 레벨의 가수가 아님에도 말이다.

물론 그러한 점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큰 산은 만년설에 덮여 있을 때 그 자체로 멋지고 훌륭하다. 필자의 생각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적 確信自尊心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율하고

있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전통가요의 폄훼와 추락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한민족의 한과

정서가 녹아 있는 우리의 노래를 아리랑 가요, 아리랑 가수로 하자는

강력한 촉구를 조선일보 칼럼란에 기고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 사실 하나를 懷古하면 다음과 같은 一例도 있었다.

나훈아는 한때 음악적 소외감에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포스터 모더니즘의 만개 이후 언론, 인터넷, 유튜브의 발달로

문화의 평준화 현상이 도래하면서 장르의 차별화 풍조 자체가 근복적 으로

해소되었지만 60년대,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서양의 대중음악이 무분별하게

수입되어 불리어 지면서 문화적 비하 현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일부 철없는 음악인들에 의하여 자행된 뽕짝론, B급 정서론 등 편견의

강을 건너오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잣나무 가지 높아 가지 끝에 서리가 내린 줄도 모르고 뛰어

노는 어린애같은 철부지 대중음악론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대중가요에 대한 필자의 사유와 관점은 이렇다.

대중가수는 각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고

대중에게 위로를 준다. 노래는 가사와 악보로 구성되어 있고

악보는 가사를 표현하는 동시에 멜로디 자체에 마력을 지녀야 한다.

클래식 음악도 음악이고 판소리도 음악이다. 특히 대중가요는 가사와

음악이 대중의 정서에 호소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대중가요를 낮춰 말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이 더 고급하다고 믿는다. 이건 어처구니없는 사대주

의일 수 있다.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 포르투칼의 파두,

일본의 엔카, 영미의 팝송도 그 나라에서 유행하는 대중가요이다.

오페라 역시 당대의 대중이 즐기던 음악을 이용하여 만든 공연의

한 형식이다. 해학과 풍자, 특히 메타포(은유)와 비브라토가 두드

러진 대한민국의 트롯도 대중가요다. 특히 이런 대중가요를 직접

창작하고 노래하여 새로운 감성을 대중들에게 推動하는 가수가

있다면 충분히 예술가 아니 더 이상의 반열에 올려 무엇이 잘못

되었고 어떤 손색이 있다는 말인가이다.

음악 특히 대중가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중음악의 위치를 전방위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하는

말이다.

위와 같은 일례와 견해 그리고 그 맥락과 연관된 몇 가지 사안들이

대중가수 나훈아의 음악적 자존감과 정체성을 공고히 하여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인 것은 분명하다.

 

 

* 나훈아의 天才性歌皇 *

나훈아 !

그는 10대에 인기가수가 되었다.

1966년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가수 등록을 한 후 1968. 8. 16.

약속했던 길”, “내사랑을 최초 취입했고(근거 : 소장앨범 자료),

곧이어 천리길”, “파도넘어 천리길”, “돌아선 길목”,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등으로 공식 음반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보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만큼 대중가요에 관한 한 천부적

끼와 기질이 있었다.

초창기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호소력 속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한과 서러움이

녹아 있어 언제나 듣는 이로 하여금 말 못 할 애잔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십 대에 이미 고향, 어머니, 사랑, 이별, 슬픔 등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합치하는 화두를 절절히 토해내면서 그 한의 정서를 규정해 나아갔다.

창과 국악에 접목된 그의 목소리와 천부적 끼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음악적 변신을 거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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