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늘 희환한 존재였다. 늘 의미를 찾는다. 생각해 보자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을 때, 사자가 들소를 잡을 때 “잠깐 나의 이 행동이 무엇을 말하고 무슨 의미인가” 라고 묻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일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무슨 이상한 짓을 할 때도 늘 의미를 묻는다. 그러다가 중간에 갑자기 눈물을 흘린 다거나 방향을 선회하기도 하고 전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끝임없는 의미와 가치 등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소위 철학적 사유를 끊임없이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끌여올린 원동력이지만 말이다. 심지어 인간은 강한 듯하면서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자살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의미있게 사는 그것에 초점을 두고 의미있게 사는 이유와 방법을 끝없이 사유하고 하게 그 해답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종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글을 읽는다는 것을 우리 삶의 실천으로 만들어준 독보적인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가롭게 뒤척이면서 읽거나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니체가 이렇게 말했다. 따위의 말로 지나쳐 버리기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정신에 일격을 가한 혁신적인 책이다. 왜냐하면 짜라투스트라가 정신이 병들었다고 하면서 저격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도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율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끝임없이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고 정신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고 또 남들과 함께 남들 속에서 대충 묻어가는 것을 독자적 실존보다도 더 선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바로 이러한 인간 군상들을 보고 인간 말종, 잡것, 천민, 노예근성. 이런 아주 모욕적인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사실 모욕을 당해도 싼 모습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짜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을 하나씩 주는 것이고 이 책을 통하여 자신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것을 커밍아웃시켜 재단해 보고 거침없이 일격을 가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과 인간의 의미 있는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방법이던지 간에 자신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 변화시키고 더 고양시켜 나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니체는 이 책에서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한가롭게 책을 뒤적거리기나 하는 자들을 미워한다. 그저 읽히기를 원치 않는다. 하나하나 씹어 자기 것으로 하기를 바란다.” 니체 자신은 이 책을 인간의 삶에 대한 자신의 처절한 고민이 들어 있는 자신의 피로 쓴 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독자는 니체의 고민을 니체만의 고민으로 남겨 두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는 즐거움을 얻으라는 것이다. 하나하나 곱씹고 체험하고 나라는 존재의 진짜 모습과 실존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도 해 보자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철학책 중 단연 압권이다. 그러나 이 책 자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책을 펼치면 그냥 넘어가긴 넘어간다, 그리고 대강 이런 것이다. 라는 정도의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논리는 선명하게 독자들이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시가 있었다. 어느 박사가 니체에게 이런 애기를 했다고 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내 짜라투스트라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당연하다고 말했다.”라고 짜라투스트라는 사실 니체의 입문서가 아니다. 니체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확립되어야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적어도 니체의 저서 중 “비극의 탄생”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정도는 읽고 이 책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짜라투스트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짜라투스트라 하나만으 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 짜라투스트라는 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철학을 전달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선보인 것을 사실이지만 그 이론과 체계가 그 안에 들어있지는 않기 때문에 절대로 명료하게 전달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아포리즘과 시인과 예언자의 목소리, 비유와 상징과 패러디 등이 동원되고 철학사의 유명한 사람들이 책 속에 다 등장하고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 책 횡간이나 갈피에 숨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 · 신약성서, 예수의 언행,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헤길, 쇼펜하우어 등은 물론이고 음악의 바그너도 들어 있고 괴테, 단테, 셰익어피어, 에머슨도 들어 있다. 그리스 로마사, 일라아드 오딧세이, 폐르시아전쟁사, 천일야화, 이솝우화까지 다 언급되고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횡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성서를 잘 알수록 짜라투스 트라를 더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이 책에서 너무나 불친절하다. 그 모든 상징, 패러디의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바가 없다. 또 숨어있는 사상들에 대해서는 일체 어떤 힌트 하나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짜라투스트라의 말들을 이해하려면 그 모든 숨어있는 것들을 다 찾아내야 한다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찾아낸 다음에 그 맥락 속에서 그 해당 되는 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이러한 난제들을 던져놓고 너희들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던지 말던지 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당부분큰 책임은 우리들 독자에게도 있다. 이 책의 구성도 우리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대 서사에서 짜라투스트라의 여정과 그의 변화를 사용하면서 그의 여정을 두 파트로 분리해 놓았다. 특히 소 서사에서 총 80장 각각의 개별 서사를 통하여 변화를 통한 대 서사를 전개시켜 놓았던 것이고, 개별 서사 하나하나에도 각각 작은 서사가 아주 독특한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 스토리 라인과 개별 서사와 큰 서사와의 연계도 늘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을 읽어내야 온전히 읽어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티비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앞의 내용의 내용이 뒤에 가서 밝혀지기도 하고 또 반전의 형식으로 전반적인 이해를 도모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전체 스토리 라인의 이중적 구조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읽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체도 구성도 어렵고 내용도 끝임 없이 파악하면서 읽어가야 하고 내용도 전부 철학적이니까 딱딱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머리가 빠지는 것이다. 당시 니체는 독자들을 이렇게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으니까 얼마나 핀잔과 인상을 찌푸리게 했는지 모른다. 더욱이 문학적 형식을 빌려 쓰다보니 우선 문학적 가면을 벗겨내야 하는 작업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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