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당시 이 책은 반 시대성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신은 죽었다”, “국가는 우상이다”, “진리는 사실 없다”, “도덕은 병이다” 등 반시대적이고 선언적인 말을 했기에 아예 냉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니체는 냉대에 대하여 엄청 실망하고 서운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리라, 백 년만 기다려 보자 아마도 그때까지는 인간을 탁월하게 이해하는 천재가 나타나 니체라는 이를 무덤에서 발굴할 것이다, 이런 작품은 아주 수준 높은 것이어서 이해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아마도 수 세기가 필요할 것이다” 라는 그리고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도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아주 기이한 부제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니체는 이 책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느끼면서 가장 아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이런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큰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최고의 책이다. 가장 심오한 책으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했다.”라고 그리고 서간집에서 “이 책은 다섯 번째 복음서이다” 즉 기독교의 복음서를 지칭한 말이다. “미래의 성서가 될 것이다.” 라고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하여는 이같이 최고 등급의 자화자찬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사실 그리고 이 책은 2,000년 유럽 지성사에서 견고하게 유지되어 왔던 토대 전체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을 현대적인. 너무나 현대적인 사유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진리의 보고에서 나올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은 적어도 절반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니체는 사실 하나의 절대적 진리는 없다. 라고 애기하지만 결국 내 이론이 진리이다. 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용을 다 담고서 니체는 페르시아 현자인 스피타마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조르아스트교를 창시했던 차라투스트 라. 라는 인물은 서양인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아테네 학당이라는 유명한 그림에도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다. 아테네 학당을 그림을 보면 오른쪽 그룹 중 앞쪽에 있는 사람인데 등 돌리고 있는 사람이 프톨레마이오스인데 손에 지구본을 들고 있고 그 앞에 정면으로 보이는 사람이 차라투스 트라이다. 그가 손에 뭔가 들고 있는데 동그란 모양의 물체를 그것이 바로 지구본이 아니고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우주본 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면 지구본과 우주본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근데 니체가 왜 차라쿠스트라라는 인물을 끌여와서 책을 썼을까? 당시 유럽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 대항할 형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항력의 문제인데 적어도 그 그리스도에 앞서 조르아스토교를 창시한 사람을 끌여와서 시대적 우위와 대항력에 밀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 짜라투스트라는 시대적으로도 세계 4대 성인들 보다 훨씬 앞선 BC 700-800년대 사람으로 이 사람을 모셔 그의 이름으로 그동안 지성사를 지배해 왔던 기독교적 종교적 가치관을 준열하게 꾸짖으 면서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어 저작했던 것이다.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처럼,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처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처럼 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나 그래서 엄청나게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커지게 되었고 20세기 세계 지성사를 흔들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철학 쪽보다 문학 쪽에서 더 쌍수를 들고 환영을 받게 되었다. 니체의 독일어가 갖는 문학적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루터, 괴테 이후에 독일어 천재라는 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던 것이다. 오히려 철학분야에서는 이 책을 아주 늦게 이 책을 전문철학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이후 철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벤야민, 아도로노, 하이데거, 야스퍼스, 들뢰즈, 푸코, 데리다, 프로이트, 칼 융 등 유명한 사람 거의 모두가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것이고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외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짜라투스트라의 정신은 등장하는 것이다. 특히 칼 융은 이 책으로 강의도 하였다. 예술가들도 뭉크, 이사도라 던커, 특히 음악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총 219명의 작곡가, 370개의 곡, 89개의 음악관련 텍스트가 짜라투스틀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평가한다. 이것을 어떤 음악 전문가가 연구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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