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을 말하다
이름     김춘근 날짜     2023-08-17 12:41:02 조회     138

4.3사건을 말하다

 

지금도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라는 의미의

문구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마치 정부가 선량한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처럼

인식되는 글들이 많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니 올바르게 전달

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소위 오늘날의 좌파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극심한 사회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

1948. 5. 10. 총선거를 앞둔 1948. 4. 3. 제주도에 숨어있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무장 폭동을 일으켜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24개의 파출소 중 12개의 파출소를 습격, 경찰관을 포함

하여 경찰 가족, 5.10 총선거 관계자 27명을 납치하여 산으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학살한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1948. 5. 10.에 치러질 총선거는 유사 이래 국민이 직접

뽑는 민주주의 방식의 첫 총선이었다. 그러니까 일제 치하,

해방정국을 거치는 가운데 정부수립과 건국을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실시한 총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던 폭동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백주에 자행되었던 사건이다.

해방정국에서 좌 우익이 극심하게 분열되는 가운데 북에는

이미 김일성(소위 북로당), 박헌영(남로당) 등이 소련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설립한 상태였고,

남한에서도 유엔의 지지를 받아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것을 방해하려고

했던 김일성, 박헌연의 공작이 제주 4·3사건이었다.

남한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설립을 반대하는 폭동을 자행하였고

그것 중 하나가 제주 4 3사건이었던 것이며 대구폭동, 여순 순천반란

사건도 마찬가지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남한 내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소련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들의 지시를

받은 남로당이 남한 전체를 북한 김일성 아니 스탈린에게 받치기

위하여 저질렀던 엄청난 범죄행위였고, 사실 이 난동으로 인한

적화야욕이 실패로 끝나자 6·25로 이어졌던 것이다.

만약 제주 4.3사건이 성공했다거나 6·25에서 무너졌다면

우리는 지금 김정은의 지배하에 있을 것이고 이설주를 왕후 이상으로

모셔야 하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못난 국가로 전락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 4·3사건이 진압되고 난 뒤 한라산은 한동안 통제되었다.

겨우 1955년도 그러니까 7년이 지난 후에야 한라산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진압군·경 측에서는 1,700여 명이 죽었고 상대는 10,000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느냐 ?

서로 간에 무장하여 심한 교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약 순수한 제주도민이었다면 당시 무장한 군경이 1,700여 명이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사실을 보더라도 당시 김일성, 박헌영의 지시를 받은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이 많이 피해를 입은것은 사실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오늘날 종북, 좌파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끝임없이 논란을 제기하면서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는것이다.

당시 우리는 유사 이래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경험해 보지도

작동해 본 적도 없는 왕조 체제 경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그런 가운데 신념화된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지상천국이 도래했다고 말하면서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의 선전에 광분하였고, 전 세계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을 때

대다수 국민들은 그저 좋다”. 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당시 실제로 제주도민 약70% 정도가 위와

같은 달콤한 공산주의 논리에 수긍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 반증이 얼마 뒤 깨지기 시작했다.

그 반증인즉 해방 이후 6. 25 직후까지 북한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즉 북한에 소련 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이 들어와서 불과 몇

년 정도 경험해 보고서야 야 이것이 아니구나”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이 전부 거짓말이고 허위였고 선전 선동에 불과한

속임수였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 예가 또 있다.

전쟁 이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하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포로 10만 명이 북으로 넘어갔고 북에서는 약 150만 명이

남으로 남으로 도망쳐 왔던 것입니다. 무려 151로 자유대한

민국이 공산주의를 이겼던 것입니다.

당시 문재인 아버지도 안철수 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남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약 제주도 폭동(소위 4·3사건)이 성공하여 한반도 전역으로 번졌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베트남 전쟁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도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공산주의

자들 때문에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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