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그리고 무지의 지 우리는 흔히 세계 4대 성인으로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를 지칭한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그 유명세에 비교하여 실제로 책을 집필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공자가 춘추를 직접 엮었다는 말이 있을뿐이다. 그런데 이분들이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 전부 대단한 제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사상을 아니 진심을 알아주었던 제자들로서 그 전파력이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가는 10대 제자가, 공자는 70명의 제자가, 예수는 12 제자가, 소크라테스는 그 유명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중세 암흑기를 거쳐 근대 철학의 문을 화려하게 열어 제친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 근대 서양 철학도 플라톤이 쓴 글의 각주 즉 댓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플라톤이 인류 철학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이후 괴테, 칸트, 헤겔, 니체 등도 플라톤이 쓴 글의 댓글 논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는 말이 있다. 물론 철학사의 양대 산맥은 플라톤과 칸트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사실상 서양철학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아니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한번 짚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먼저 “소크라테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의 외모다. 못생겼을 뿐만 아니라 작은 키에 배도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전형적인 추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체력과 정신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테네 군의 보병으로 3차례나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그 당시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죽음에 대한 공포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신력을 강하시켜야 한다면서 평소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한겨울에도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말 술이었다. 밤이 새도록 마셔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자들이 떡이 되어서 하나씩 나가떨어지면 새벽에 혼자서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귀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들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었다.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길을 가다가도 고민해야 할 무언가가 떠오르면 꼼짝 없이 밤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마치 박제된 인간같이 나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24시간 이고 48시간이고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인물인지 대충 느낌이 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ㅎㅎ 무지의 지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카이로폰"이라는 양반이 델포이 신전에 가서 무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그러니까 그 무녀가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라고 했답니다. 카이로폰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서 “테스형, 델피아 신탁이 그러는데 형이 그리스에서 제일 똑똑하대” 라고 하니 소크라테스가 어이없이 하면서, 왜냐하면 당시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기에는 자기는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데 왜 나를 제일 현명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겼던 것이고, 급기야는 당대의 철학자,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찾아가서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뭐 대단히 알고 있는 듯이 마치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있듯이 말하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 이렇게 생각하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은 적어도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델포이 신전에서 자기를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이 내려온 것이 아닌가 ! 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무지의 지인 것이다. 이때부터 소크라테스는 견고한 철학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즉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좀 알라는 뜻으로 쓴 것이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도 인간의 시기심, 질투심, 고소, 고발이 만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소 고발이 일어나면 재판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변호인 제도가 없어서 주로 재판정에서 피고인 스스로가 말을 잘 해야 하기에, 그래야 배심원들을 잘 설득하여 무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젊은이들 사이의 필수 과목이 변론술, 수사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토양이 되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수많은 괴변론자들이 속출하였던 것이고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물론 소피스트 중에는 철학사에 족적을 남긴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배출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한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서 등이 대표적이지요 위와 같이 수업을 해 주고 많은 수업료를 받다 보니 당시 프르타 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엄청난 부를 창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유명한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해 주고도 전혀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제자들이 원래 다 알고 있었던 것인데 태어날 때 망각의 강을 건너다 보니 잊어버린 것을 그저 상기시켜 준 것 뿐인데 수업료를 받은 것은 양심에 가책이 된다“고 하면서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기는 산모가 낳고 산파는 산모를 도와주는 것일 뿐인 것처럼 지식은 제자들이 스스로 깨치고 나는 제자들을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인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인 것이지요.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바보 멍청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양심, 그 생각만은 우리가 분명 이해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향응”을 받은 것입니다. 향응 ? 반문할지 모르나 “심포지움”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심포지움이 학술대회, 학술 발표회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당시의 심포지움은 그냥 뒷풀이 정도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냥 밤새 술 마시고 놀고 이야기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스코라테스가 말술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딱입니다.ㅎ 제자들이 떡이 되어서 다 나가떨어지면 모두 정리를 하고 말끔하게 뒷정리까지 한 후 집에 가서 잠시 잠을 청한 후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서 맨발로 아테네 광장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무슨 말 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어제 마신 술로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그러면 입이 근질거렸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다짜고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우피프론"이란 한 청년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청년이 살인죄를 범한 자기 아버지를 고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개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내려오고 있지요. 그 당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의 제자 플라톤은 현재까지 실질적으로 철학사의 모든 화두를 생산해 낸 장본인으로 아카데미적 사고의 금자탑을 이룩한 사람이 되었고 이데아의 세계를 전개, 이데아 사상을 발전시켰고 그후 아우구스 티누스, 그리스도 사상과 반목과 경합을 통하여 인류철학사와 지성사에 기여한 공은 거대하다 할 것이다. 요즈음 방송, 유투브, 인터넷 등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세계 어디에서나 각종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방구석 철학이나 방구석 공부를 통하여 세계와 소통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학문과 지적능력에 대하여 착각 아닌 착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즉 고대 소크라테스 시대와 같이 앵무새 같이 말만 해 대는 소피스트들 즉 괴변론자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어 건전한 대화의 광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구석 철학도 좋고 수십 개의 박사 학위 논문에 천착하는 것도 광의의 학문 연구의 한 방식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타인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마음 가짐, 너와 나는 사실은 별반 차이가 없고 동등하다는 근원적 인식의 태도, 적어도 기실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소크라테스적 겸손 그 인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2023. 12. 13. 한 해를 보내면서 안개낀 서피랑을 바라보며 법무사 김춘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