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산사 100일의 추억) 오늘도 흙냄새 물씬 풍기는 골방에 앉아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발동기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힌다. 그 소리는 적어도 나에게는 시끄럽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공부를 한답시고 1.5평 정도의 초가집 방안에 틀어 박혀 있는 자신이 못나 보이다 못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다. 벌써 몇 년 째인가 ! 부모님 보기에도 이웃 보기에도 민망하고 죄스럽다. 마치 병자 같은 모습으로 문풍지 달린 찌그러진 방문을 열고 기어 나오다시피 하여 세상의 햇빛을 본다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웃 어른들 보기에 부끄럽다. 오래된 집이라 방은 좁고 더웠고 흙벽이라 냄새까지 난다. 방안 구석을 기어다니는 개미 떼, 징그러운 발이 달린 공포스러운 벌레도 가끔 본다. 그래도 그 방은 내가 중학교 졸업 때까지 할머니와 같이 생활했던 공간으로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다. 유년기의 안타까운 순간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었고 감성이 어린 소중한 장소인 것이다. 선풍기가 없다 보니 시원한 바람을 쐴 수도 없다. 한증막이었다. 늘 땀이 몸에 배어 있었고 그렇다고 자주 씻을 수도 없는 형편과 나쁜 습관이 한 몫 더했다.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소리같이 들리는 발동기 소리를 애써 마음으로 외면하면서 잠시 자리에 누웠다. 어젯밤 늦게까지 책을 본 탓인지 이내 잠이 들었고 누군가가 나의 손목을 살포시 잡는 촉감에 잠이 깨었다. 그러나 눈은 뜨지 않고 그대로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였다. 손목을 잡은 아버지의 손은 꺼칠했다, 막걸리 냄새, 더운 기운이 감도는 보리 떼 냄새, 독한 담배 냄새가 뒤섞인 냄새였다. 보리 타작을 하시다가 자식이란 놈이 모든 것 외면한 채 방안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을 것이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하여 방으로 들어오셨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의 하얀 손목을 잡으면서 아버지가 속삭이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불쌍한 놈! 우째겠노, 공무원이라도 해야 밥이라도 먹고 살지, 먹는 것도 시원찮고, 남들은 밖에서 일하는데 이 좁은 방에서 청승스럽게 공부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나” 순간 그 말이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솔직하고 진심 어린 푸념의 중얼거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록 한 때 술과 노름으로 밤낮을 지새웠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그 말에 울컥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고백이라서일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자식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솔직한 고백이 그때 나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 있었기에 처절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평생 처음 들어보는 그 내면의 중얼거림에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정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행여 들킬까 봐 잠꼬대를 가장하여 살짝 돌아누웠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뜬 나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많이 피곤하지 이놈!” 아닙니다. 잠시 피곤해서 누웠는데 잠이 들었네요, 잠시 뜸을 들이던 아버지는 말했다. “일꾼들이 쉬는 틈에 잠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밖에는 보리타작하느라 시끄럽고, 발동기 소리도 들리고, 동네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데, 이런 곳에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노, 너도 힘들고 지켜보는 우리도 힘이 든다. 내가 다 알아보았는데 절에 들어가서 공부하는게 어떻겠노, 추석 때까지 한 100일 공부하면 도움이 되겠지”라고 하셨다.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내가 꼴 보기 싫다는 소린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고생하는 것이 너무나 안쓰럽다는 것임이 분명함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잠시 천정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았다. 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게 낮겠다. 어젯밤에 엄마하고도 다 애기했다.” 그다음 날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새벽 다섯 시 아직 타작하지 못한 보리 짚 가래가 많이 남아 있고 발동기에서 나오는 기름 냄새와 보리 짚단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왜 그리 서글프고 우울했는지, 부모님은 저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공부한답시고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절로 들어가서 기약 없는 공부에 매진해야만 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용렬한 내가 싫었다. 떠나가기 전 잠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쌀 한 자루, 고급 담배 한산도 한 보루를 들고 오셨다. 종이 필터로 된 15원짜리 파고다를 피우다 50원짜리 한산도의 맛은 부드럽고 향긋한 냄새까지 났다. “그래 힘들지, 아버지하고도 애기했는데 아무래도 공부하기가 절이 낮을 것 같다, 네가 알다시피 농사라도 많으면 농사라도 지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을 땅마저 없으니 천상 공부를 해서 형님들처럼 공무원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나”
순간 앞날에 대한 암담함과 서글픔이 온몸을 짓눌러 왔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곧 닥칠 절간의 두려움과 낯 서러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가 주신 쌀 한 말을 짊어지고 한산도 한 보루를 품에 안고 이웃 사람들이 볼까 봐 서둘러 떠나는 나에게 어머니는 몸빼에서 꺼낸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집에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하여 고갯마루까지 한숨에 뛰다시피 가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가는 길을 걱정스러운 모습 으로 지켜보았고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