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지는 고갯마루에서 속절없이 흘러야만 했던 그 눈물의 봉투 생각에 잠시 고개를 문풍지 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밥 잘 먹고, 잘 있거라” 절을 떠나면서 나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의 지난한 일상 속에서 어느덧 여름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산사의 바람은 너무나 청량하고 신선해서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1983. 9. 7. 절을 떠났다. 떠나올 때 입고 온 체육복 한 벌과 예비군복 한 벌은 이미 색이 바래고 조금만 힘을 가해도 찢어질 것 같이 헤져 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엉덩이 부분이 닳아 맨살이 보일 지경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하여 전두리 마을 쪽으로 내려가면서 심한 갈증이 났다. 주위를 보니 외딴 초가 한 채가 보였다. 길옆 논둑길을 가로질러 200여 미터를 가니 싸리나무로 만든 삽작문이 달린 여러 개의 방이 있는 큰 초가집이 있었다. 흙으로 된 마당은 넓었고 빗질을 하여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목이 타서 체면 불고하고 “계십니까?” 하면서 걸어 놓은 밧줄을 걷고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머리를 땋아 엉덩이 부분까지 늘어뜨린 전형적인 시골 아가씨가 나왔다. “목이 말라 그런데 물 좀 먹을 수 있겠습니까?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총총걸음으로 봉당으로 내려 오더니 정지 간에 딸린 펌프로 가서 한참을 펌프질하여 모래를 가라앉힌 후 박 바가지에 시원한 지하수 한 바가지를 내밀었다. 그때 그 물 한 바가지는 갈증을 해소해주기에 충분했고 잠시나마 그동안 힘들었던 내 영혼을 씻겨주기에 충분했다. “고맙습니다”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사립문을 열고 나오다가 그 아가씨의 순수한 정성과 모습이 생각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 아가씨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박 바가지를 손에 든 채 봉당에서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방안 으로 쏜살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행색이 초라한 나를 연민의 모습 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지금도 그 아가씨의 정성을 잊지 못하겠다. 드디어 고향 집으로 가는 완행 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공덕산, 반야봉을 바라보았다. 백로의 하늘은 더없이 높고 청명했다. 저곳이 내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란 말인가 ! 버스는 뿌연 먼지를 내면서 고향 집으로 달리고 있었다. 끝.
2024. 4. 8. 김 춘 근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