仇宗吉公 삶에 대해서 公의 諱는 宗吉이요 字는 子安이요 號는 川谷이다 고려 말 서기 1363년 창원시 북면 내곡에서 태어나시고 卒年은 未詳이다. 配位는 星州李氏 李恬의 女이고 父는 生員 仇雪이요 母는 康津金氏 金乙龍의 女다. 상조(上祖)는 고려 국초(國初)에 내의성(內議省)의 長官 내의령(內議令 종1품)을 역임(歷任)하고 서기 945년에 의창군(義昌君)에 封해지고 義昌郡을 食邑으로 下賜 받은 구성길(仇成吉 配位는 月城李氏 侍郞 李時昌의 女)공의 후예(後裔)이다. 의창군(義昌君)의 子 구희(仇喜 配位는 慶州朴氏 朴季龍의 女)공도 또한 내의령(內議令종1품)을 역임했다. 의창은 금일 창원이다. 고로 후손들이 昌原仇氏(昌原具氏)라 한다. 父는 일직 돌아 가시니 여막(廬幕)을 지어 墓에 아침 저녁으로 省墓하기를 삼년을 하루같이 하여 눈과 바람 비가 와도 그치는 날 없이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 하여 주역을 읽고 그 이치를 깊게 통달하였다. 문장은 지조가 있고 書는 화려 하였다. 향리에서 여러 번 벼슬을 추천하여도 응하지 않았다. 북면 내곡에서 후학의 양성에 힘을 다하여 문하생 중 과거급제자가 5~6명이 나왔으며 마을 앞 송촌(松村)에 살고 있던 통천최씨 최윤덕도 문하생 중의 一人이다. 어느 날 공의 문하생 중에서 과거를 급제하여 경사스러운 잔치 연회석에서 公의 모친과 동석한 자리에서 모친이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들으니 聖人이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道가 있는데 가난하고 천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어진 임금님이 위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士君子가 벼슬을 할 시기가 아니겠는가? 또한 너한테 배운 사람이 다 及第하여 父母를 영화스럽게 하는데 너만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하였다. 公는 어머니께 절하고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소자가 나라에 계책을 올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면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멀리 떠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서입니다.」하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벼슬을 한 뒤에 네가 나를 봉양해도 좋지 않겠느냐?」하시니 公은 「어머니의 뜻이 이러하시다면 어찌 어머님 말씀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때는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4년째(1422년)라 그 해 가을에 과거 시험이 있는 해라 公은 서울로 들어 갔는데 국가(태종 이방원이 죽음)에 마침 일이 있어 과거는 이듬해(1423년) 봄으로 연기가 되었다. 公은 兵曹에 門下生 정랑(正郞 정5품) 이중적(李仲適)이 있었다. 公은 제자에게 말하기를 「위로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나는 늙어 병들었다 만약 이대로 고향에 가면 다시 응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안의 성곽 누대는 두루 구경했으니 궁궐의 여기저기 보고저 하는데 어떠하냐?」 물어니 문하생이 답하기를 「궁궐 안은 외인 출입을 엄금하고 있으나 병조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선생이 만일 보시고자 하시면 오늘 수직은 문생의 당번입니다.」하였다. 제자가 서리(書吏)를 시켜서 선생을 인도하여 병조에 모시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당직실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때 시간이 초저녁이라 임금께서 병조에 명령하여 랑관(郞官)으로 하여금 숙직을 강화하라 하니 각처 아문(衙門)에서 경비를 한층 엄중히 하였다. 문생(門生)이 청직을 시켜서 술과 안주를 울리고 公을 모시고 하루 밤을 자게 되었다. 제자는 순시하러 나가고 公은 혼자 앉아 고향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청직이 술과 안주로 위로하니 객회(客懷)가 조금 나아졌다. 때는 가을이라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시간을 알리는 북과 종소리가 은은하게 궁중에 울리니 객회를 이기지 못하고 슬며시 병조의 문을 나와 깊숙한 곳에 당도하니 날아 갈듯한 높은 누각과 옥지작교(玉池鵲橋)가 있고 능파정(凌波亭)이 있었다. 좌우 층계에는 백화가 향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그 곳이 후궁(後宮) 화원(花苑)이었다. 이 밤에 임금께서 몸소 옥교(玉橋) 위를 거닐면서 가을 달빛을 즐기고 있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원중(苑中)에서 노는 것을 보았다. 임금께서 괴이하게 여겨 시종을 시켜 그 분이 온 내력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영남 창원에 사는 사람으로 과거 보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하니 시종이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괴이하게 여겨 몸소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저는 영남 창원 사람으로 일찍 부친을 잃고 홀로 계신 모친을 모시고 다만 공자님의 도를 닦으면서 평소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顯達)할 뜻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로부터 배운 5~6명의 제자들이 차례로 과거에 합격한 것을 저의 노모께서 보시고 부러워하시고 또 저의 부진한 모습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이제 만년에 과거에 응하라는 모명(母命)이 있어 서울에 온 것입니다. 서울에 와서 보니 과거 일자가 다음해로 연기되어 내일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병조정랑 이중적(李仲適)은 저의 門人인데 마침 순시하러 밖을 나가 없어 저 혼자 숙직방에 누워 있으니 객회(客懷)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어 이제는 어디로 나가야 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듣고 다시 묻기를 「君이 공자학을 배웠으면 주역(周易)을 아느냐?」하니 公이 답하기를 「유자(儒者)의 학문에 주역(周易)은 빠지지 않습니다.」하니 임금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 또한 주역 곁을 떠나지 않으나 역리(易理)가 현묘(玄妙)하여 해석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오늘 저녁 월색이 촛불같이 밝으니 잠시 역리를 논함이 어떠할꼬.」하니 公이 대답하기를 「잠시 강론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존장은 어떤 직품을 가지고 어디 있는 분입니까?」하니 왕이 답하기를 「나는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다.」하니 公이 말하기를 「그러면 문(文)을 높이십니까? 또는 무(武)를 높이십니까?」하니 임금께서 말하기를 「文도 아니며 武도 아니다.」하니 公이 묻기를 「文도 아니고 武도 아니면 역리를 어디 쓰겠소?」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文도 아니고 武도 아니지만 경륜으로써 나라를 구제하고 강기(綱紀)를 세우는 일은 곧 대장부의 일이다. 그러므로 음양(陰陽) 이기생성(二氣生成)의 묘리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하니 公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런 뜻이라면 서로 의난(疑難) 점을 문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왕이 시종에게 명하여 야기(夜氣)가 추우니 향기나는 술과 주역책 한 질을 가지고 오라 하였다. 임금(세종)이 公에게 술을 권하면서 강론을 시작하였다. 公이 말하기를 「내가 암송할 것이니 존장은 책을 펴 보며 물으시오.」 하니 왕이 다시 묻기를 「제괘(諸卦)가 좋소 계사(繫辭)가 좋소?」하고 물으니 公이 대답하기를 「천풍(天風) 구괘(구卦)와 지뢰(地雷) 복괘(復卦)는 천지의 수미(首尾)요 陰陽의 종시(終始)에 관한 괘입니다. 이 두 괘를 풀어 나가면 만화생성(萬化生成)의 이치와 길흉화복(吉凶禍福) 조짐을 환하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대로 바로 풀이를 하였다. 세종대왕은 公이 이치에 밝은 君子임을 알고 조금 있다가 하는 말씀이 「나도 왕을 시종드는 한 사람으로 어제 전교(傳敎)를 들으니 내일 모래 정시(庭試)가 있다 하니 그대는 더 머물러 있으면 좋겠소.」 또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 책은 글자가 선명하여 늙은 사람 일기에 좋으니 소매에 넣어 가오.」 그러면서 주역 일부를 병조 숙직실에 보냈다. 다음날 李門生이 숙직실에 들어 선생을 문안하니 公이 말하기를 「네가 경비 관계로 밖에 나간 후 한 곳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의관이 속되지 않고 행동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자칭 문직(文職)도 아니오 무직(武職)도 아닌 사람인데 이 땅을 지키는 사람이라 하기로 잠시 강론을 하니 역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더라」하였다. 즉일(卽日)에 왕이 예조를 시켜서 정시를 보이도록 하였다. 公이 입장하여 시험을 보니 장원(壯元)으로 뽑혔다. 왕이 인견(引見)하여 어필(御筆)로 써서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정9품)의 벼슬을 주고 먼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과 대전제률(大典諸律) 등을 편찬(編纂)하게 하고 또 언문(諺文 반절 反折 언서 諺書 언자 諺字)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한당송문장선집(漢唐宋文章選集)을 번역(飜譯) 및 강론하게 하였다. 아울러 성균관(成均館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에서 주역을 강론케 하였다. 위와 같이 편찬, 연구, 번역, 강론을 하게 하여 휴가를 주지 않았다. 과거 급제 후 일년이 되도록 고향에 가지 못하여 모친(母親)을 사모하는 마음이 드디어 병이 되어 여러 번 왕에게 간청하여 휴가를 얻었다. 세종대왕이 부득이 휴가를 주고 관직을 직제학(집현전 종3품)에 승직(昇職)시켜 주었다. 公은 고향으로 출발하여 모친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리고 先祖의 山所에 성묘도 하고 고향에 여러 친척과 마을에 계시는 어르신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고 휴가 期日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니 서기1423년 가을이다. 세종대왕이 公에게 별도의 언문(諺文 반절 反折 언서 諺書 언자 諺字) 연구를 특별히 지시하니 公은 관원을 거느리고 언문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의 기초는 중국 운학(韻學 한자음운을 연구하는 학문)을 바탕으로 하여 연구가 시발되었다. 초기에는 언문을 반절(反折), 언서(諺書), 언자(諺字) 등으로 불이어지다가 언문의 완성단계에는 훈민정음이라 하였으며 후대에 왔어는 한글이라 명명되어 졌다. 연구를 거듭하는 가운데 세종은 또 公의 관직을 제학(提學 종2품)에 올려 주었다. 서기 1425년에 公은 세종에게 휴가를 여러 번 간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公이 고향에 가면 되돌아 오지 않을까 싶어 명주(明珠) 한 개를 표신으로 하사하여 휴가를 보냈다. 조정의 친구인 고관들이 한강에서 전송하며 마침 강을 건너려는 때에 선전관(宣傳官)과 환관(宦官)이 왕명을 받들고 술을 갖고 왔다. 환관이 公에게 술을 권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들은 비록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나 주상(主上 임금)이 수결(首結 목걸이)을 하고 있는 명주(明珠)를 듣기는 하였어도 보지 못했으니 잠시 우리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어떻소?」하니 公은 사양하다가 부득이 내어 보이니 환관(宦官 內侍府 사람)이 명주(明珠)를 강에 던져버리고 곧 환궁했다. 公은 놀라 어찌 할 수 없어 강가 주점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삼일되는 날 아침에 주점 주인이 말하기를 「나으리께서는 식음을 전폐하셨으니 반드시 심열(心熱)이 생겼을 것이오니 오늘 낚은 고기 한 마리를 회로 하여 잡수시오.」하니 公은 창문을 열고 보니 과연 한 자나 되는 잉어였다. 곧 회를 떠라 하여 배를 째니 명주가 판에 떨어지는데 전에 임금님이 하사한 명주이다. 公은 기뻐하며 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 때 왕이 궁중 하인을 시켜서 가만히 살펴보니 선생은 이미 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후회하여 마지 않았다. 公은 모친을 뵙고 또 산소에 성묘를 하고 기한 내에 서울에 돌아왔다. 왕이 인견하고 하시는 말씀이 「갈 때 표신으로 준 명주를 그대로 갖고 왔느냐?」물으니 公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명주를 바쳤다. 왕이 크게 괴이하게 생각하여 환관을 불러 엄하게 꾸짖기를 「먼저 제학(提學 종2품)이 강을 건널 때 특별히 지시한 바 있었는데 너희는 일부러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형벌을 주리라.」하니 선전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이 저기 있는데 소신(小臣)이 어찌 속이겠습니까. 公은 땅에 엎드려 사실대로 고해 올리니 왕이 감탄하면서 하늘이 대현(大賢)을 우매한 나에게 내렸다 하시고 사부(師傅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使 정1품)에 임명했으며 경상감사에 명령하여 公의 大夫人과 夫人을 서울로 모셔 오게 하라 하고 특별히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公은 영의정부사와 영의정부사의 兼職인 경영관(經筵館), 집현전(集賢殿),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세자(世子) 사(師)의 職을 맡아 충실히 행하면서 국정(國政)의 운영(運營)을 원활히 수행하여 세종대왕을 성군(聖君)으로 만드는데 일익(一翼)을 하였다. 실록에 기록은 없으나 모성씨세보(某姓氏世譜)에 의하면 公은 世子 師로 기록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多幸)한 일이 아니겠는가? 세자(世子) 사(師)는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가 겸직(兼職)이다. 역사(歷史)는 때와 장소(공간)에서 발생한 내용을 기록(記錄)된 것을 역사라 하고 기록(記錄)되지 아니한 것은 역사(歷史)가 아니다 하였던가? 그렇다. 기록(記錄)은 상당히 중요한다. 개인의 역사나 어떤 집단의 역사나 국가의 國史나 모두가 소중한 자료다. 또 이런 말이 있다. 문(文)은 무(武)보다도 강(强)하다. 이해(理解)가 가는 명언(名言)이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의 재임기간은 서기 1426년부터 서기 1431년까지 재임했으며 公의 卒年은 문헌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死後에는 세종대왕이 언문(諺文) 창제(創製)와 여러 업적(業績)에 대한 공로(功勞)로 왕릉(王陵)에만 세우는 석양(石羊)를 公의 묘전(墓前)에 좌우에 각각 한마리씩 세워 주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公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 초기에 文官으로 묘전(墓前)에 석양(石羊)이 있는 분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를 역임(歷任)한 이거이(李居易)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昌原仇氏 사성(賜姓) 연교문(筵敎文)을 쓴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묘전(墓前)에도 있다. 묘소는 창원시 동읍 남산리 구천등(龜川嶝) 유좌(酉坐)이다. 현재는 도굴에 의한 석양은 분실 상태이다. 아쉽게도 세종대왕 실록에 公의 업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후손으로 한스럽다. 끝으로 公의 유사(遺事)가 세종실록에 기록이 없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세종실록의 편찬 시기와 편찬책임자, 총감수자, 시대적 상황을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서기 1418년 8월부터 서기 1450년 2월까지) 편찬 착수는 서기 1452년 3월부터 시작하여 서기 1454년 3월에 완성되었다. 처음의 편찬책임자는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였으나 서기 1453년(단종 1년) 계유사화(癸酉士禍)로 황보인과 김종서가 피살되어 총감수는 정인지 혼자 맡게 되었다. 정인지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지지세력에 가담한 인물로 수양대군이 세조(世祖)로 등극(登極)하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에 임명된 인물이다. 김종서는 순천김씨요, 황보인은 영천황보씨이다. 계유사화(癸酉士禍)로 국정의 운영은 영의정부사 수양대군쪽의 세력에 의해 집행되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단종(端宗)쪽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가는데 서기 1455년 6월에 단종이 하야(下野)를 하고 얼마 뒤 서기 1456년에 병자사화(丙子士禍)가 일어난다. 이때 많은 절의파(節義派)들이 화(禍)를 입었으며 후대의 사람들이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구분하여 불렀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몇 명의 권력욕심(權力慾心)으로 계유사화(癸酉士禍)와 병자사화(丙子士禍) 때 아까운 많은 인재(人才)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또 많은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유배(流配)를 갔는가? 아울러 公의 문하생들도 얼마나 화를 입어 겠는가? 권력쟁탈의 과정에서 사화는 진행되면서 세종실록의 편찬 내용은 수양대군과 정인지에 의해서 사초(史草 史官이 기록하여 둔 史記의 草稿)와 춘추관(春秋館)의 시정기(時政記 史官이 나라의 일 가운데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추리어 적은 기록)의 기록 내용이 추가(追加), 삭제(削除), 변경(變更)을 거쳐 세종실록이 편찬되어 금일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창원구씨 구동직(仇東直 生1415 ~ 卒1469)공은 당시 승지(承旨)로 재임(在任)하고 있는 시기로 문종(文宗)과 단종(端宗)의 지지세력에 있다 유배(流配)를 간 인물(人物)이다. 구동직공의 墓가 임오보(1762년)에는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동면(東面) 자좌(子坐)라 했고 정사보(1797년)에는 춘천(春川) 연화산(蓮花山) 자좌(子坐)로 기록되어 있다. 능성구씨(綾城具氏) 구치관(具致寬)은 계유사화(癸酉士禍)에 가담했으며, 함길도에 파견되어 경성부사 이경유(李耕柔)를 참살하여 수양대군의 신임(信任)을 얻어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능성(능주)具씨은 고려 서기 1224년 중국 宋나라에서 난리(亂離)를 피해 韓國 全南 羅州地域으로 피신온 氏族이다. 중국에서 渡來時에 姓字가 具字이다. 昌原仇氏와 同姓同本이 아니다.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지지세력은 김종서, 황보인, 구동직, 사육신{死六臣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생육신{生六臣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등이고 세조의 지지세력은 정인지, 구치관, 한명회(韓明澮) 등이며 한명회는 死後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사람이다. 이상과 같이 시대적 흐름의 상황을 살펴 볼 때 창원구씨(昌原仇氏)은 세종, 문종, 단종의 지지세력에 가담함으로 구종길(仇宗吉)공과 구복한(仇復漢)공은 세종대에 관직을 역임한 분이고 구동직(仇東直)공은 세종 말기, 문종, 단종 3대에 걸처 관직을 역임한 분으로 세종실록, 문종실록, 노산군일기(단종실록) 등에 기록의 내용이 삭제된 배경이 아닌가 사료된다. 세종실록에 살펴보면 당시 수양대군의 반대쪽에 있던 인물들이 실록에 기록이 삭제 된 것을 타 성씨에도 찾아 볼 수가 있다. 계유사화와 병자사화에 禍를 입은 臣下들을 복권(復權) 조치를 한 임금은 성종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조 때 까지 절개(節槪)있는 신하(臣下)들의 요구에 의해 점차적으로 복권을 시행한 것을 실록이나 명신록(名臣錄), 향토지, 개인문집 등에 나타나 있다. 끝 文에 부언(附言)하면 서기 1466년에 영의정부사를 영의정으로 병마도절제사를 병마절도사로 改稱이 되었다. 07년 10월 16일 作. 領議政府事 仇宗吉公 墓域(世宗大王 師傅, 文宗 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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