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잎 클러버
이름     김춘근 날짜     2016-06-03 14:56:22 조회     1633


                                       세 잎 클로버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한글 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행운보다는 행복이 상위 개념이라는 정도는 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주위에 널려있는 행복을 등한시하고 행운을 찾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힘든 인생을 살아간다.


제록스사의 영업사원인 “로버트 기요사키”가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는데 그

경험을 쓴 책이 바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이다.


아마 1990년대 말경으로 기억한다.


그때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농간과 경제 관료들의 무지, 정권교체기의 혼란기 등과

맞물려 일시적인 금융자산의 유동성 부족 즉 흑자부도였음에도 “국제통화기금사태”

라는 초유의 비극을 겪은 때라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물질만능주의에 정신이 나가 있을 때였다.


돈만이 지고한 가치이고 인생의 성공과 성패의 척도로까지 생각되어 지던 시기였다.
 
그러던 시기에 위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등장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덕분에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그런데 나는 그 책을 구입하여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제목만 보아도 그 책 내용이 뻔히 내다보였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그 가치와 본질을 논하는 버릇이 있는
 
탓도 있겠지만 혹여 돈을 버는 방법만을 가르쳐 주고 자랑하기 위한 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체질상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책은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 반대의 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았다.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이라는 책이었다.


자발적 가난, 이상했다


가난이면 가난이지 자발적 가난이 무엇이란 말인가 !


다소 역발상적인 어법이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 잘 쓰여 진 책이고


권장할 만한 책이었다.


가난에 대한, 물질에 대한 철학적 소고였고 인간 삶과 물질에 대한


권련관계를 철학적으로 풀어낸 수준 높은 책이었다.


“창조적 가난”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성스러운 가난”이었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미래와 존재에 반하는 투쟁이었고,

야망과 권력에 얽매여 사랑을 잃고 자아를 상실한 채 타인에게 운명을 내맡기는 데

대한 해독제의 처방전 같았다.


근대적 의미의 프로젝트들은 “인간을 고용과 노동에 묶여 놓으면 물질적 생산을 통하여

인간에게 결국 더 많이 쓸 수 있는 에너지와 잉여의 시간을 줄 것이고 그러면 결국 더

행복해 질 것이다”라는 예언까지 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거주지를 실내로 옮기고

육체노동을 기피하며 전기로 냉난방을 하고 더 많은 자동차와 냉장고, 전화 그리고

필요 이상의 여가 시간과 쾌락을 누릴 만큼 부유한가에 따라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결정한다.


신중한 행동과 인간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사고, 전쟁의 감소와 행위와 목적의 고매한

척도는 문명화를 논의할 때 아예 사라진 개념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


그건 아니었다.


위와 같은 근대적 프로젝트들은 인간에게서 “기도의 길을 따름으로서 얻은 고독,
 
참 지식에 대한 왕성한 욕구, 희생과 자기부정의 정열, 동료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

등을 박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일구는 것을 제1의 가치로 삼은 근대의 프로젝트들은

우리의 신체에 가난은 벗어나야 하는 것, 극복해야 될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각인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난은 삶을 누추하게 만드는 질병이다.


우리는 한사코 그 질병에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 생산의 증대와 부의 축적을 우선적

가치로 추구하도록 세뇌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의식에는 가난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들어앉았다.


그러나 가난을 예찬할 수는 없지만 물질적 집착에서 해방된 삶이라는 뜻에서

“역설적으로 가난은 자연의 법을 따르는 삶”이다.


“벌집은 최소한의 밀랍으로 그것을 가장 튼튼하게 받칠 수 있는 각도로 만들어져 있다”


자연에서는 남아도는 것이 죄악이다.


미켈란젤로에 따르자면 “자연은 낭비를 정화하도록 되어 있다”.


서양속담에도 “사치는 인간을 저질스럽게 만들고 낭비는 인간을 지저분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자연상태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동물에게 비만이란 없다.


하마조차도 본디 그런 체형을 타고났을 뿐 비만상태는 아니다.


자연의 신호가 아니라 문명의 신호에 따라 사람과 사람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만이

비만에 빠진다.


비만은 낭비라는 나쁜 습관이 초래한 질병이며 인위적 재앙이다.


자연에서 처벌되지 않는 낭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의 비용으로 공학적 공간을 얻는 벌집과 공중을 날기 위해 속을 비우는 새들의

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은 낭비를 정화하여 생존 조건을 최적화하는 지혜를 내재화

하고 있다.


작은 거처와 소박한 삶은 가난의 물질화된 양태이다.


가난은 “불필요한 필요의 끝없는 확장”을 즉시 멈추는 것이고 그리고 일체의 과잉을

끝없는 추문으로 만드는 고결한 선택의 결과이다.


필요를 무한정으로 키우는 방식의 삶은 필연적으로 물질의 오용과 남용에 이른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가난은 아니 의도된 가난, 자발적 가난은 그것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일 수 있는 것이다.


“지구는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필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은 자원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킬 만큼 자원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공허한 풍요의 황폐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더욱 생활과 사고의 단순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산의 증식을 향해 늘어선 강요된 가치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발적으로

가난에 들어갈 수 있는가? 재산의 개념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침묵과 마음의 평화, 건강, 깊은 사유와 자유, 텅빈 가운데서의

충만한 느낌.....과 같은 비물질적인 가치가 왜 중요한 가치가 아니란 말인가 !


자발적 가난은 어떤 의미에선, 도덕의 축이고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가치이다.


무소유(필요한 만큼의 소유)를 삶의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 힌두 고행자들, 불교 승려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일회용 소비를 끊고 욕망을 최소화하며 금욕주의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욕망의 복잡함 속에서 난파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새벽별이며

등대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리하여 자아를 욕망의 고삐에서 풀어 자유로운 영혼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자 결심할 때다 !


당신은 공허한 풍요를 선택할 것인가 ! 아니면 창조적 영감을 주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할 것인가 !


물질적 재화는 원론적으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우리는 언제나 소유의 허상만을 손에 쥘 뿐이다.


이 소유의 허상을 일찍이 밝은 혜안으로 볼 수 있었던 카아네기의 아포리즘이 있다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삶은 아름답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죽어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못난 사람이다”라고


설사 우리가 욕망하는 그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의지 범주를 넘어

서는 잉여의 소유는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하고 쓸데없는 열정을

소비해야 한다. 그것은 더 많은 근심과 불안을 낳는 원천이다.


말초신경을 만족시키는 탐욕과 필요 이상의 안락함에 대한 갈망을 끊고 “꼭 필요한

최소의 것으로, 존재의 단순한 골격만으로 부유함의 모든 욕구”를 대체해야 한다.


의도된 가난은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하나의 과정, 하나의 기원, 하나의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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