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답사를 마치면서.......... 2016. 4. 14. 드디어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대마도 답사가 1박 2일 일정으로 실행되는 날이다. 창원향토사연구회에서의 해외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적어도 필자가 창원향토사연구회에 들어온 이후로는 최초로 맞이하는 해외 답사이다. 그래서인지 계획되었을 때부터 약간의 흥분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국의 낯선 여행의 경이로움은 출발하기 전부터 열광이 시작된다는 데 있지 않을까 ? 쾌속선을 타고 가면서 부산항이 멀어질 때의 알지 못할 공허감과 애잔함, 멀리서 조망되어 지는 부산항의 또 다른 모습과 그 속에 감추어진 비련, 대마도에서의 차창 밖의 모습들...... 잘 가꾸어진 우거진 숲을 보아도, 물고기가 헤엄치는 깨끗한 개천을 보아도, 생활의 편리를 고려한 검소한 건물을 보아도, 단장된 유적지를 보아도, 도로상에 다니는 대부분의 경 차량들과 말없이 길을 거니는 사람들을 보아도, 소박하기 그지없는 차려 놓은 음식들을 보아도..... 맛과 멋을 떠나서 이국의 하늘 아래서 느끼는 알지 못할 흥분 요소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답사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함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마음 언저리에 편안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문화유적 답사는 사실상 그 속성이 여행을 본질로 하고 있다. 이 답사나 여행을 수없이 해 보았지만 몇 번 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떠나느냐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소 생각해 왔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방랑자의 ”디 엔 에이“가 내재되어 있다”고, “열정의 삶은 끝없이 떠나고 유랑해야 한다”고, “아니 삶을 바꾸기 위해 떠날 줄 알아야 한다”고 답사는 인간 본성과 원초적 본능이라는 본질로의 회귀이다. 그러기에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나의 삶의 자양분은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있어 왔던 꿈과 여행, 시와 방랑이 아니었던가 ! 닐 암스트롱은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를 위한 거대한 도약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 그렇다, 답사는 나 자신 지나온 삶에 대한 반추이고 미래에 대한 도약인 것이다. 그러나 장미에도 가시가 있듯이 여행이나 답사에도 불편함은 있다. 여행(travel)은 고대 프랑스어 (travailler)는 골칫거리, 고뇌와 같은 뜻을 가졌다고 한다. 라틴어로는 트리팔리움(triplium)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뚝 세 개가 묶은 로마의 고문도구 이름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여행은 고생길, 고문 같은 것이라는 의미를 원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린 떠나야 하는 황홀한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말했던가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고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
드디어 여행 당일 약40여 명의 창원향토사연구회 회원님들과 같이 부산 국제터미널 3층에 도착하여 대마도 하타카츠항 도착 쾌속선 비틀호에 몸을 실었다. 예상과는 달리 날씨는 너무나 청명했고 바다는 잔잔했다. 사실 배로 여행하는 것은 뭔가 모르게 설레임과 더불어 겁도 난다. 혹시 파도가 심하여 배 멀미를 심하게 하지는 않을까 아니 배 멀미 정도야 참는다고 하더라도 혹시 큰 사고라도 이런 못된 생각까지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현해탄 ! 이 현해탄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한이 서려있는 바다이기에 “검을 현” “노을 탄”을 써서 “검은 노을의 바다”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산에서 시모노세끼 까지 전체를 “대한해협”이라고 부르고,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를 “부산해협”, 대마도에서 시모노세끼 까지를 “쓰시마해협”이라고 불러야 한다. 대한해협을 지나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한국과 일본과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관계, 멀고도 가까운 나라, 지진 천국 일본의 운명과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불안하고 불운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의 현주소 등 괜시리 걱정할 필요도 걱정해서도 아니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야시대 철기문화의 일본 전래(일본은 지금은 교정이 되었지만 자기들의 역사서 일본서기를 왜곡 해석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면서 아스카 문화가 삼한에 침투하였다고 주장하는 어처구이 없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백제 불교문화의 전래, 임진왜란, 조선통신사 왕래, 명치유신, 강화도조약, 갑신정변, 을미사변, 한일합방, 윤심덕과 김우진의 현해탄에서의 동반자살, 휘젠 나고야 성과 대중가요 황성의 달과 황성옛터의 탄생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위안부할머니들의 애환, 아리랑에 얽힌 이야기, 사할린 동포의 귀국 등. 수 백 가지의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일본을 상징하는 단어도 내 머리를 어지럽히긴 마찬가지였다. 선진국이면서도 기독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 선과 깨달음, 하이쿠(17자로 된 일본의 전통 정형시), 스모선수, 파친코, 가부키, 젓가락, 미소된장, 사시미, 스키야키(일본의 전형적인 음식중 하나로 직접 날것의 요리하는 과정을 손님들에게 보여주면서 생과 사, 날것의 황혼을 생각하는 의식적 행위를 연출), 덴푸라, 정원 등등 그러나 가까스로 한 두 줄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 일 역사가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인식되어 지고 있고 일치하는 그것이었다. “일본은 고대사의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끝없이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의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조건 무시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진리이면서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좋은 예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하고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본의 고대 원주민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고 대부분이 한반도 등 몽골리아드가 들어와서 오늘날의 일본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불편한 진실은 일본인들도 긍정하고 수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려 90만 명의 유전자를 “디 엔 에이” 분석 결과 확정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일본이라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국문화가 어떻고 일본 문화가 어떻고 하지만 분리적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더 큰 틀에서 초기 삼국의 정립시기나 가야, 왜 등 5개국의 카테고리 속에서 바라볼 줄 아는 역사적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문화의 상호작용, 주고받는 관계성 등, 더 큰 틀에서 역사를 상호 유기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더 미래지향적이고 지혜로움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흘러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 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저 멀리 계곡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이미 호수물이 아니고 계곡물인 것이다. 아직도 호수물이라고 고집한다면 참으로 미련하고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 동양의 황하문명과 인더스문명이 중국이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래되었고,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만든 바둑 역시 중국 요, 순시대 중국에서 발생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지만 그 문화의 꽃을 피운 것은 정작 일본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고 흘러 인류의 문명사가 그러하듯이 최근문화의 역전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예후가 심상찮게 솟아나고 있다. 제2의 황하문명이 도래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 문명의 끝은 어디인지, 결국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최후는 오고야 말 것이라는 예단이 허구는 아닌 것 같다. (에보시타게 전망대에서) 일본에 도착하자말자 아소만의 전경을 360도 조망할 수 있는 에보시타게 전망대를 보았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한 구한말 선각자최익현선생 기념비, 수선사, 이즈하라 도보여행, 일본 무사들의 거리, 조선통신사비, 와니우라 한국전망대, 대마도역사자료관, 비운의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 등 많은 곳을 두루 살펴보고 왔다. 이곳들의 상세한 기록은 필자가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책자나 자료 등을 통하여 수없이 언급되어 왔기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답사기는 책에 나와 있고 관광지에 소개되어 있는 문구의 나열이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소 필자의 소견이기도 하거니와 답사기는 학술지가 아니라 답사한 사람의 포괄적이고도 전반적인 주관적 느낌을 그러니까 개인의 독특한 체험과 느낌을 기술하는 것이어야 읽은 사람은 물론 새로운 사유의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굳이 느낀 점 한 두 가지를 이야기 하라면 “도심을 흐르는 개천에서도”, “도로에서도”, “차고지에서도”, “음식에서도” 깨끗하고 소박하고 정제된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자기안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것이 삭막함을 드러내 삶에 멀미를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배울 점이라는 항목에 있어서는 부인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착 당일 저녁에 만찬장에서 있었던 신승희 회원의 동백아가씨 열창을 듣고 있던 그곳 현지인들의 시선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 동시에 최근 대마도에 물밀 듯이 밀려오는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운의 덕혜옹주에 대한 해설사의 열변) 답사 다음날인 4. 15. 16:00경 대마도 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는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훨씬 홀가분하고 가벼웠다. 바다는 우리를 반기듯이 고요하고 청명했다, 파도 한 점 없는 호수와 같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부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면서 부르던 한 서린 노래가 생각났다. 최초의 한국 창작대중가요이며 규수지방의 휘젠 나고야성의 황량함을 보고 노랫말을 지었다는 일본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의 달을 벤치마킹하였다는 1932년에 레코딩 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전라도 부호의 아들 유부남 김우진과 성악가이면서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의 애달픈 사연이 있는 1926년에 레코딩 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사의 찬미”, 1936년도에 레코딩 되어 1939년도에 “애수의 소야곡”으로 재 녹음된 남인수의 “눈물의 해협” 등 당시 민중의 애환을 달래주던 절절한 노래가 생각난다. 아무런 대과없이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우리 향토사연구회 회원 여러분의 성숙한 질서의식과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자존감과 품위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지면을 빌어 창원향토사연구회 회원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면서 현해탄의 애환과 사연이 담겨있는 노래 몇 곳을 같이 불러본다. 감사합니다. (사의 찬미) 1926년, 외국곡, 작사. 노래 윤심덕 (1절)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허무 (2절)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은 건 설움 (3절)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내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허무 너 찾는 건 설움 (눈물의 해협, 애수의 소야곡 원곡임) 1936년, 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절) 현해탄 초록 물에 밤이 나리면 님 잃고 고향 잃고 헤매는 배야 서글픈 파도 소래 꿈을 깨우는 외로운 수평선에 짙어 가는 밤 (2절) 님 찾아 고향 찾아 흐른지 십년 몸이야 시들어도 꿈은 새롭다 아득한 그 옛날이 차마 그리워 물 위에 아롱아롱 님 생각이다 (3절) 꿈길을 울며 도는 파랑새 하나 님 그려 헤매이는 짝사랑인가 내일을 묻지 말고 흘러만 가렴 님 없는 이 세상에 기약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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