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 답사
이름     김춘근 날짜     2017-05-31 12:06:17 조회     1943


 


칭다오 답사


 


“중국을 알려면 산동을 가야하고, 산동에서도 어제를 알려면 곡부(공자의 고향)와 임치(강태공의 고향)를 가야하며, 오늘을 알려면 청도를 가라”는 말이 있다.



멀리 길을 떠나 답사를 하는 가장 큰 뜻은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인간이 사는 곳을 내려다보노라면 인간 군상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그 속에 내재된 희. 노. 애. 락 등 삶의 의미를 대강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인간의 생은 어쩌면 이러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용인의 폭에 의하여 삶의 의미가 결정되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좀 더 사유의 폭을 확대해 보면 인간의 생명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간은 길어도 백 년을 넘기기 힘들지만 공간은 시간과 달리 신축의 범위가 무한정으로 넓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생명의 질적 차이는 상당한 정도로 공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맥락에서 공간적 의미를 찾아 나서는 답사는 문화나 역사의 잠재능력과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에 도달할 수 있다.


 


2017. 3. 22. 09:00경 김해국제공항 2층 국제선 대합실,


웅성거리며 서 있는 한 무리의 들뜬 표정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날이 다름 아닌 창원향토사연구회 2박 3일 일정의 칭다오 답사 날이었다. 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 새벽에 닭이 울면 인천 앞바다에 그 소리가 들린다는 산동반도에 자리 잡은 칭다오이다. 산동지방만 해도 전체 인구가 약 1억 1,500만 명이나 되고 칭다오 외에도 여러 개의 도시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비교적 큰 도시는 아님에도 인구가 무려 900여만 명에 가깝고 중국 전체로 보면 20위권 내에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도시란다.


약14억의 인구를 가진 나라이고 보니 고개를 끄떡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좁은 국토면적 등과 비교할 때는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속속 회원들이 도착하고 드디어 11시 대한항공에 탑승 이륙했다.


 


필자의 옆 좌석에 앉은 미국인으로 보이는 초로의 승객이 눈을 감은 채 도착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행색으로 볼 때 사업차 가는 사람 같았으나 무언가 초조하고 근심어린 듯한 그 이방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서툰 영어로 한마디 말이라도 붙이고 싶었지만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시차 때문인지 중국에 도착해도 12시가 채 되지 않았다.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는데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하여 절차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공항청사를 빠져나오자 담배연기가 뒤섞인 듯한 약간은 쾌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였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마다에는 황토색 미세먼지가 많이 쌓여 있음을 보았다. 중국에서도 가장 청정한 지역이라는 뜻의 청도인데 중국 내 대기오염의 심각성을 새삼 느꼈다. 그리 예민한 필자가 아님에도 역시 중국임을 실감할 수 있는 냄새였고 분위기였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는 상당히 넓고 깨끗했다 무엇보다 등받이가 편안하면서도 낮아 상체가 깊숙이 빠지지 않고 시야가 트여 멀미날 염려가 없었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신 여행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산동성을 대표하는 글자는 노(魯)자이다. 그 옛날 노나라, 제나라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란다. 차번호에서부터 모든 것이 “魯”자 라는 글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더욱 놀란 것은 처음 공항에 내려서 차량들을 보니 약 30%∼40% 정도의 차량이 독일제 아우디, BMW, 벤츠, 일본의 도요다 승용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간간히 현대나 기아 차량도 목격이 되었다. 순간 한국민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꼈으나 한편으론 무역경쟁의 치열함과 무역종사 근로자들의 수고로움이 가슴 한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사실 답사기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여행기를 쓰는 것 보다는 또 다른 깊이와 연구가 필요하다. 여행기는 내용상 비교적 단순하게 쓰여 질 수 있지만 답사기는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 지역의 문화적 전통에 천착되어 이루어지는 내용을 그 기본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답사 중에 항상 노트와 필기도구를 챙겨간다. 세밀한 묘사는 아니더라도 그때그때 느낀 바를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몇 자씩 메모를 남겨두는 방법으로 기록한다. 그 다음 답사기를 쓸 때 온갖 기억을 되 살려 덧칠해 나가는 방법을 동원한다. 이번 창원향토사연구회에서 답사한 칭다오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화적 교류가 그리 많지 않기에 그 자료 역시 많지 않다. 그러기에 답사기를 쓴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구양수 베개”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글쟁이들이 겨우 몇 줄의 명문을 쓰기 위하여 옹이가 박힌 울퉁불퉁한 목침을 베고 자면서 자는 듯 마는 듯 미몽 상태에서 그러니까 단 몇 줄의 글을 쓰기 위하여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우선 중국이란 나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대략적인 기술을 해 보자.


인류문명의 발상지, 수천 년의 유구한 역사, 수많은 왕조와 영웅호걸들이 명멸해 간 나라, 그 만큼 숱한 부침과 사연들이 가득한 미지의 나라, 이것이 중국이란 나라다.


중국 영토의 북쪽 끝은 북위 53도의 흑룡강성 막하이고 남쪽 끝은 북위 4도인 남사군도의 증모암사이다. 위도 차이만도 50도이고 거리는 약 5,000킬로미터에 이른다. 동쪽 끝은 흑룡강과 오소리강이 만나는 곳이고 서쪽 끝은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파미르 고원이다. 경도 차이만도 62도이다. 경도 15마다 1시간의 시차가 생기므로 우리가 도착한 칭다오도 김해와 비교해 볼 때 1시간의 시차가 난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중국의 육지면적은 960만 ㎢로 러시아, 캐나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4번째이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외하곤 캐나다, 미국과의 국토면적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한반도 면적의 44배 정도이고 남한 면적의 약100배이다. 상동반도에서 장강입구까지의 바다인 황해는 평균 깊이가 44미터이고 장강 입구에서 대만 해협까지의 해면을 동해라 부르는데 평균 깊이는 370미터이다. 중국의 연안에는 많은 항구 도시가 북에서 남으로 위치해 있는데 대부분 해외운수와 국제 무역항이다. 특히 중국의 대외 개방을 위한 경제특구로 대련, 진황도, 천진, 상해, 복건, 하문, 심천, 주해, 광주 그리고 우리가 방문한 청도 등이다.


 


그동안 부침을 지속하다가 현재의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민족인 한족은 총 인구의 약92프로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장족이 광서성, 운남성, 광동성에 분포되어 살고 있고, 다음으로 만주족이 요령성, 베이징, 하북성, 흑룡강성, 길림성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구한말에서 해방 전까지 특히 일제침략시절에 먹고 살기 위하여 많은 선조들의 만주 일대로 이주하여 살았던 지역으로 우리 민족의 이주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그 다음으로 회족, 묘족, 위구르족, 토가족, 이족, 몽고족, 티벳족 순이다. 그러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에 비하면 미미할 정도이며 앞으로 한국에서 들어와 살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숫자가 이들의 인구 비율을 넘어설 전망으로 보고 있다.


4대 직할시로는 북경시, 천진시, 상해시, 중경시가 있으나 이중 중경시는 인구가 무려 2,800만 명에 달하며 나머지 3개 직할시도 약2,000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당도한 칭다오는 900만의 대도시지만 중국에서는 인구 서열 19위 정도에 불과하다.


 


필자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이런 생각을 했다.


중국에 가서 인류 글자의 기원이 되었던 갑골문자의 전설에 대하여, 황하문명의 발생에 대하여, 그동안 공부하고 열망해 왔던 인간 삶과 만물의 진리를 궁구(窮究)했던 노자, 유교사상의 원류 공자, 맹자, 순자, 혼탁한 세상을 자유롭게 노닐다가 떠난 장자에 대하여, 삼국지의 주인공들인 조조, 유비, 제갈공명, 한신, 관우, 장비 등등에 대하여, 귀거래사를 지은 도연명 과 시선 이태백, 시성 두보, 백거이 등등에 대하여, 그 외에도 최초의 천하통일을 한 시황제에 대하여,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에 얽힌 이야기들과 권력욕 때문에 자식까지 죽인 서태후에 대하여 까지 그리고 중국 국부인 쑨원과 중국 근대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루쉰 등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고 많은 영감과 감동을 준 사상가들에 대하여 알아보리라 생각하면서 짧은 답사 길에 올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적어도 마음속으로나마 그 역사적 인물이 태어난 본류에서 그 사상적 흐름을 음미해 보리라 열망하면서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막상 도착해 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그럴 겨를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면에 흐르는 그 무엇이고 겉으로 드러난 칭다오는 적어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곳곳에 자본주의, 현대 물질문명이 만연한 현장을 보았을 뿐이다.


 


도착하여 버스로 약50여 분을 달려 숙소 부근에 위치한 바닷가로 갔다.


먼저 중국의 사상계와 중화인민공화국을 사상적으로 이끌어 온 루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중국인들은 루쉰(노신, 1881-1936, 광인일기, 아큐정전의 저자)을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일찍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혁명가 마오쩌뚱(모택동, 1893-1976)은 그를 가리켜 중국 민족 개조에 앞장선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요, 중국 문학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공을 기려 추앙의 징표로 많은 도시들이 공원 이름에 ”노신“ 붙이기를 좋아한다. 청도에도 ”노신 공원“이 있다. 물론 일정상 가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회천만의 해변 길을 따라 만든 노신공원 산책로에 노신의 시를 새긴 기다란 노신시랑을 세워 노신을 모셔다 놓았다고 한다.


 


청도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소어산 공원”에 갔다.


청도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산자락에 전통양식의 3층 8각 정자가 우뚝 선 곳 거기에 소어산 공원이 예쁘고 소담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자에 올라서면 앞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현대화된 청도시가지가, 뒤쪽으로는 옛 독일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유럽풍의 붉은 벽돌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렇게 일찍부터 개방된 청도의 모습은 예스러운 중국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중국 전통의 멋과 맛을 추구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중국 근대사에 첫 치욕을 안겨준 나라는 역사책에서 배웠듯이 영국이다. 아편전쟁 때 잠자는 사자 중국이 힘없이 굴복하는 것을 본 서양 열강들은 동네 북 치듯 달려들었고, 1897년 독일은 선교사 두 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청도를 비롯한 산동성 일대를 강탈했던 것이다. 이때 독일군이 청도에 진입하면서 청도 소어산에 대포를 설치했다. 당시 독일군 사령관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유위 기념관”도 답사하였다.


이 강유위(1858-1927)라는 사람은 제국주의 침략에 만신창이가 된 청나라의 시대적 고뇌를 한 몸에 안았던 선각자였고 근대적 개혁을 요구했던 선구자였다. 마치 김옥균이 민비의 방해로 개혁에 실패하고 “3일천하”로 끝난 사건과 유사하다.


상해 망명객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중국의 개혁가 강유위의 글을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고 한국통사를 눈물로써 읽었다는 강유위는 풍상 많은 인생 말년을 이곳 청도에서 보냈기에 기념관을 이곳 청도에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3.1운동을 생각게 하는 5. 4광장도 답사하였다.


중국 국기인 5성 홍기를 보면 큰 별 하나에 작은 별 4개가 홍색 바탕에 배열되어 있다.


이 큰 별은 공산당을 의미하고 작은 별은 농민, 노동자와 소자산가, 민족자산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별 5개의 5자와 작은 별 4개가 5.4운동의 축약적 표현이라는 해석이 재미있기는 하다. 청도시청 앞 해변에 넓은 5.4광장이 있다. 이곳에 가니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쳐 오르는 횃불 모양의 빨간 강철탑을 볼 수 있었다. 이 탑이 5월의 바람, 5.4탑이며 5.4운동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면, 5.4운동의 발원지는 북경이었지만 도화선은 청도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도를 지배하던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전승국인 중국은 청도를 도로 찾는 줄 알았다. 그러나 청도 반환은커녕 산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는 “21개 조”가 관철되자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래서 북경대 학생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여 정책을 바꾸는데 성공했던 것이고 이것은 앞서 한국에서의 3.1운동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할까봐 대놓고 5.4운동을 기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하루해가 저물었다.


저녁 식사로 양꼬치가 나왔다. 제법 맛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중국풍의 향이 음식 곳곳에 배어 있었다. 처음은 약간 역겨웠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지면서 먹을 만 하였다.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습관들이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답사 이틀째였다.


답사 목적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청도박물관에 갔다. 많은 유물들을 보았지만 필자의 지식의 한계로 일일이 설명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아쉬운 점은 시간이었다. 해설자의 설명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그 유물에 담긴 속살을 일일이 알 수 없었다.


 


도교의 성지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정평이 있는 노산(일명 구수봉)도 차를 타고 가면서 멀리서 보았다.


“노산을 보지 않고서는 청도를 본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는데 일정상 직접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노산은 해발 1,133미터로서 산동성에서 태산과 몽산 다음가는 제3의 고봉이며 바닷가에 불쑥 솟아 있어 해상 제1명산이라고 부른다. 일명 “구수봉”이라고도 하며 진시황이 지궁을 만났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는 중국판 클레멘타인의 전설이 숨어 있는 “석노인” 바위도 볼 수 있었다.


 


칭다오의 해변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칭다오의 명물 중 하나인 “교주만 다리”를 보았다.


자그마치 그 길이가 36.48㎞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새만금 방조제가 33㎞라고 하는데 다리 길이가 그렇다니 가히 짐작이 간다.


청도는 “작은 유럽”이라고 한다. 1890년 독일은 중국을 위협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양보를 얻어냈고 1898년 독일인들은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한 칭다오에 독일인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가장 이상한 건물을 칭다오에 있는 “독일 총독의 집”으로 카이저궁을 본떠서 만들 것이라고 한다. 그곳을 많이 퇴색된 듯한 느낌은 들었지만 궁궐처럼 호화로웠다. 성벽, 화강암과 회반죽으로 치장한 발코니, 영국 튜더 왕가풍의 기둥, 유약을 바른 타일, 회전식 계단, 지붕이 있는 현관과 갤러리, 온실 등이 있었다. 1906년도 건물이었지만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아서 영원히 남을 것처럼 보였다.


그곳 안내원의 설명은 1958년 마오쩌뚱이 칭다오를 방문했을 때 머문 곳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1970년대 문화혁명이 위세를 떨칠 때 홍위병의 악마적인 위세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1898년 중국은 독일의 위협에 굴복하여 칭다오를 99년간 임대하도록 허락했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많은 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웠다. 그들이 지은 모든 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이 많았고 독일인들이 놓은 지린행 열차가 여전히 운행되었으며 양조장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좋은 맥주를 생산하고 있었다. (“칭다오 비어” 라는 옛 상호를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


부드럽고 깊은 향취가 나는 맥주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아쉽게도 필자는 술에 약하여 혹시라도 맥주라도 몇 잔 들이키면 취하여 일정에 차질이 있을 까봐 조심해서 반 잔 정도만 먹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 외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와인박물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땅굴을 개조하여 와인 박물관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규모가 가히 세계3대 와인박물관답게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칭다오에 관한 “중국 안내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 칭다오는 100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신흥도시이다. 이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으나 1949년 이후 급성장했다. 이곳은 제국주의풍의 건물 수 만 큼이나 외세에 의한 점령도 많았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곳이었다. (심지어 미 해군의 제7함대도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었다고 함) 중국인들은 그 굴욕감을 잊지 않고 있으며 단지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이다. 현재 이 도시에 일본인 사업가 등 외국 사업가들로 들끓고 있다고 한다. 독일 제국주의의 전초지였던 이곳 칭다오는 일본, 미국, 중국의 민족주의자들, 극렬파 홍위병(유럽 봉건주의풍의 도시와 미신적인 그리스교도 온상에 격노했던)등에게 지속적으로 포위되거나 점령당하다가 결국, 예스럽고 휴양하기 좋은 해변 마을로 변했다고 한다. 주택들은 영국 노인들이 즐겨 찾는 해안 마을인 벡스힐-온-씨에 옮겨 놓아도 손색이 없을 듯 하고 게다가 산들바람이 부는 산책길도 있었고 부두도 있었고 아무튼 현재의 칭다오는 당일치기 여행자들이 오는 저속한 유원지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당 고위 간부들은 칭다오에 아파트를 갖고 싶어 한단다. 그래서 맑고 쾌적한 날씨와 바다 냄새(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바다 냄새 맡기가 힘들고 그래서인지 바다를 좋아한다)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한단다.”



당시 안내원이 명(名) 불상(不祥)의 전통시장 두어 군데를 데리고 갔다. 그야말로 한국의 큰 난전 정도의 시장이었는데 규모는 대단하였다. 왁자지껄하고 뭔가 정돈이 안 된 듯한 느낌, 마치 쓰레기가 풍요로움의 상징이나 되듯이 도로 곳곳, 시장 내 곳곳에 쓰레기를 수북하게 쌓아 놓은 현장을 여러 군데서 목격했다. 이 점에서는 일본과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눈동자에서 순박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이 중국의 잠재력과 발전가능성을 말해 주는 하나의 오염되지 않은 원천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역설적으로 해 보았다. 돈의 세상이었다. 어디를 가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이 즐비했다. 말이 사회주의고 공산주의지 주민들에게 뿌리박힌 의식은 이미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 모든 것이 물질적인 풍요의 추구,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거였지만 언제 중국이 이렇게 변했고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가치체계가 바뀌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1970년대 말 등소평의 등장으로 인한 “흑묘백묘론”으로 시작된 자본주의 시장의 개방이 그 시발점이 된 것 만은 분명하다. 공산주의의 지주격인 모택동(마오쩌뚱)과 산업화의 시발점인 등소평이 현재 중국 국민들로부터 가장 추앙받는 사람임을 미루어 볼 때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아직도 아련히 숨 쉬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물질문명과 풍요의 맛을 보게 한 등소평, 이 양자의 정신세계가 중국인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중국은 빈부 격차, 환경파괴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함은 물론 인권, 환경 등 일류국가로서의 많은 가치들을 수렴할 때 비로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미래는 밝고 긍정적이라는 시각에는 변함이 없다. 거대한 땅, 거대한 인력, 어마어마한 지하자원, 엄청난 자본력이 현재의 중국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어 있지만 이 같은 좋은 조건의 구슬을 꿰매는 일은 무엇보다 자신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긍심이 아닐까 싶다.


동북공정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는 거대한 문화의 중심에 있다는 자부심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비록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정신 속에 각인된 자기 뿌리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어떤 외적 조건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사실 이런 자부심과 자기 혼이 깃 들여 있는 자양분이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야 기초가 튼튼한 국가발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문화적 고리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 칭다오 답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떠나기 전 “사드문제“로 불거진 중국의 보복문제와 안전 등으로 많은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러나 답사는 떠나야 하고 떠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위험도 불편함도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답사가에게는 그런 것들은 기우(杞憂)이고 사족(蛇足)에 불과할 뿐이다.


여행가 “장 그리니에”가 말했던가 !


“혼자서 아무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상상을 수없이 반복한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울려오는 먼 북소리, 그 미지의 열망과 그리움이 우리를 길 떠나게 한다, 어쩌면 병적일지 모르나 변신을 유도하는 촉매제라면 기꺼이 뛰어들리라”라고


 


우리는 답사를 통하여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삶을 견인해 주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간 심연에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지 않는 감성, 사랑, 행복, 자아의 덕성을 위하여 길 떠나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단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답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변모시키기 위한 성찰의 시간이라면 말이다.


답사 내내 필자의 뇌리에 천착되어 떠나지 않는 그 무엇은 따로 있었다. 이국의 풍물을 보아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낯선 이국인들과의 스침과 눈빛에도 내가 무엇을 위하여 걸어 왔고,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회고와 질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위안하고 정리해 나갔다. 작가 “위치우이”는 말했다. “누가 뭐라고 말하던 인간은 언제나 걸어온 길의 가장 끝에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 영원한 끝, 계속해서 움직이는 끝에 서 있다는 사실” 그렇다 내 자신의 영혼의 끝,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후회와 아쉬움의 끝, 그것에 천착되어 오늘 그리고 내일을 훼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 그것이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도저(到底)한 슬픈 곡선을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인간의 인생일 수 있다는 “무거운 받아들임” 말이다.


 


세계 어디에도 중국만큼 우리 민족에게 문화적 영향을 끼친 나라는 없다. 더 크게 인류문명사는 정말 위대하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룡은 무려 1억 8,000만년을 지배하면서 살았는데 인간은 겨우 100만년 정도에서 지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찬란한 문명을 구가하면서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 그 이유는 바로 “인류는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푸스 산에서 신들이 사용하는 불을 훔친 이래로 하루라도 진리를 탐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즉 인간은 다른 종과 구별되는 “생각하는 갈대”라는 것에 있었다. 그 속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성 속에 숨겨진 감성과 반추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 인류의 문명은 인간들의 정신 작용에 의한 그 부산물 중에 하나이다. 일찍이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자연은 위대하다, 그리고 자연은 물 한 방울로도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죽이는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 그것은 자연은 자신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이다”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


이러한 맥락 속에서 중국의 광활한 대자연을 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정신, 인간이 만든 인류문명사를 잠시나마 보고 상상해 왔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


 


무수한 역사의 고비 고비가 인간 정신의 요체요, 인류문명사를 견인해 온 강인한 역사의 증거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중국의 “위치우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간 역사의 총론”을 말한 바 있다.


“역사 속에 숱한 인간의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을 것이며,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이 위대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백발과 필연적인 결별 그리고 영원한 상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 고대 그리이스의 비극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중해를 앞에 두고 끊임없이 저 피안(彼岸)을 향해 거친 파도를 헤쳐나간 용사들이 있었기에 영원히 빛나는 그리스의 신화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문명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기에 모든 인류문명사의 위대한 발전과 도약은 숙명적으로 폐허위에서 존재해 왔고 또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문화답사기의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는 중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 위치우이의 명문 “페허론”을 이 답사기에 싣고자 한다. “인류문명사의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이 명문을 회원들과 간절한 마음으로 공유하고 싶다. 동시에 이번 답사기를 쓰는 과정에서 이 위대한 작가의 저술들과 조우(遭遇)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큰 기쁨과 감회를 느낀다.



“ 나는 폐허를 저주한다. 그러나 또한 폐허에 내 감정을 의탁(依託)하기도 한다.


폐허는 나의 바람, 나의 기억을 삼켜 버린다. 산산이 부서진 기와 조각이 황량한 잡초 사이에 흩어져 있고, 석양 아래 부서진 돌기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책 속의 이야기들이나 어린 시절의 환상과 같은 모든 것들이 폐허 속에서 괴멸하고 있다. 이전의 영광은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창업을 이룬 옛 선조들이 차가운 바람 속에서 소리를 질러 대고 있다. 밤이 다가오면 아무것도 본 적이 없는 밝은 달이 쓴 웃음을 지으며 구름 속으로 사라져 폐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대대로 누적된 것이 결코 역사는 아니다. 폐허는 파괴, 상실, 결별이며 또한 선택이기도 하다. 시간의 힘은 이 대지 위에 흔적을 남겨야 마땅하다. 세월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길에 올록볼록한 흔적을 남겨야 한다.


폐허가 없다면 어제도 없으며, 어제가 없다면 오늘과 내일도 없다. 폐허는 교과서이다. 그곳은 우리에게 지리를 역사로 읽게 만든다. 폐허는 과정이다. 인생은 옛날의 폐허 속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폐허로 나아가는 것이다. 처음 세워지면서 이미 앞으로의 영락을 생각하게 한다. 폐허는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층 더 새로운 건설 역시 폐허를 기반으로 한다. 폐허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폐허는 진화의 긴 사슬이다.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유명한 폐허로 걸어 들어가 고개를 드니 문득 두 눈 가득 눈물이더라는 것이었다. 그 눈물은 참으로 복잡한 눈물이다. 증오이자 상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폐허는 고집을 표현한다. 마치 더 이상 몸을 쓸 수 없게 된 비극적인 영웅과도 같다. 폐허는 변화가 극심한 삶을 보여준다. 폐허를 통해 사람들은 민족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엿볼 수 있다. 폐허는 죽어가는 노인의 말처럼 당신을 감동시킨다. 폐허는 일종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대지를 이탈한 이를 대지에 귀의하는 미로 바꾼다. 그리고 다시 수년이 지나면 그것은 흙으로 돌아가 대지와 완전히 하나로 융화된다. 아직 융화가 덜 이루어진 단계가 바로 폐허이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창조를 부추기고, 또한 미소를 지으며 이러한 창조를 거두어들인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지나치게 힘든 것을, 세상이 지나치게 붐비는 것을 걱정한다. 가을날 떨어지는 누런 낙엽을 본 적이 있는가 ? 어머니는 그들이 행여나 추워할까 걱정하여 품에 그들을 받아들인다. 누런 낙엽이 없으면 가을도 없을 것이다. 폐허는 바로 건축의 낙엽이다. 사람들은 이 누런 낙엽의 의미가 봄을 잉태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누런 낙엽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친구 두 명이 내 앞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한 친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그믐날 밤에 동쪽 하늘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폐허를 혼자 거닐며 시를 읊거나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한 친구는 새벽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면 밤의 유희를 제대로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습관은 별빛이 드문 하늘 아래 작은 길을 찾아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나는 그들과 같이 호탕한 감정이나 정력은 없다. 그저 사람들이 모든 폐허를 새롭게 바꾼다고 이리저리 수리하고 재건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다.


고대 로마의 격투장, 품페이의 고성(古城),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마야 문명의 유적지들에 대한 재건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는 먼 옛날의 청동기에 광택을 내고, 출토된 부러진 창에 니켈 도금을 하며, 송대 판본 도서에 비닐을 입히며, 마왕태(馬王堆)의 한(漢) 대 묘에서 출토된 미이라에 피부 이식을 하여 가슴을 풍성하게 만들고 다시 화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단절시키거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반드시 노쇠한다. 늙어 가는 것은 그대로 늙어 가도록 하라.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자상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일 터이다. 천진함을 가장하는 것은 가장 잔혹한 자아 학대이다. 주름살이 없는 할머니란 무시무시한 존재이며, 백발이 없는 노인은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진다. 폐허가 없는 인생이란 너무도 피곤하고, 폐허가 없는 대지는 너무도 복잡할 것이며, 폐허를 숨기는 행동은 지나치게 허위적이다.


역사에 진실을 들려주고, 생명에 과정을 돌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인류의 지혜로움이다.


물론 모든 폐허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구는 상처투성이의 대지가 될 것이다. 폐허는 고대가 현대로 파견한 사절단이며, 역사 속 군왕의 선별과 선택을 거친 곳이다. 폐허는 조상들의 웅장한 행동에 의해 탄생한 것이기에 그곳에는 그 지역의 모든 역량과 정수(精髓)가 숨 쉬고 있게 마련이다. 부서져 가루가 된 유적지 역시 폐허가 아니다. 폐허에는 가장 질긴 역사의 인대(靭帶)가 있어야 한다. 또한 폐허는 또 다른 읽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폐허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곳에 머물고 싶은 자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만 한다. 그렇다. 폐허는 하나의 자장(磁場)이다. 그것의 한 끝은 고대에, 그리고 또 다른 한 끝은 현대를 향한다. 그리고 마음속의 나침반은 이곳 폐허에서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자력을 상실함은 곧 폐허의 생명을 상실함과 동일하다. 그렇게 되면 그 폐허 역시 사람들에 의해 금세 도태되고 말 것이다.


폐허에 대한 수리가 모두 쓸모없는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심스럽게 정리하고 흔적이 남지 않게 고심하면서 설계하고 애써 본래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면 여러 사람들이 편안히 구결(舊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폐허에 대한 은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의 끝은 말 그대로 명실상부한 폐허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마다 추모할 수 있는 폐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리를 하게 되면 일단 어느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폐허를 수리하는 이들의 숙원일 것이다. 또한 모든 중건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폐허조차 없다고 한다면, 옛것을 거두어 오늘날에 새롭게 누리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큰 뜻을 어찌 부정만 할 것인가 ? 그러나 그것이 그저 현대 건축가들의 고전적 풍격(風格)으로 옛 이름만을 본 따게 된다면 분명 웃기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황학루를 다시 지으면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도 있을 것이며, 아방궁(阿房宮)을 재건축하여 호텔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등왕각(滕王閣)이 재건축되면 상가가 들어설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역사와 전혀 관련이 있을 리 없다. 만약 폐허가 있는 상태에서 중건을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대로 보존한 채 그 옆에 재건축을 시행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싶다. 폐허를 불도저로 그냥 밀어 버린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너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리를 하건 재건을 하건 간에 폐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을 보존하는 일이다. 원명원의 폐허는 북경에서 가장 역사적 느낌이 뛰어난 문화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이를 모든 없애버리고 참신한 원명원(圓明園)을 재건축한다면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가. 청 왕조의 모습도, 타오르는 불꽃도, 민족의 울분도, 역사적 느낌도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니, 이는 어제 저녁의 정담을 모두 잊어버리거나 옛적 꿈을 송두리째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들이 거둘 수 있는 것은 어제의 꿈이 아니라 오늘의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폐허 문화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중국어로 폐허라는 말은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다. 분명 사람들이 말을 들으면 놀라거나 싫어할 것이다.


사람들은 진부한 생각으로 옛것을 회고하든가, 실용주의적으로 시대의 추이를 따른다. 옛것을 회고하는 자는 그저 옛것으로 지금을 대신하려는 생각뿐이며, 시대의 추이를 따르는 자는 지금의 것으로 옛것을 없애 버릴 생각뿐이다. 그 결과 서로 치고 죽이고 결국 양쪽이 모두 패배해 상처를 입고 만다. 이는 역사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자 역사를 부러뜨리는 일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선혈이 낭자하다. 이처럼 오래고 거대한 민족임에도 이전의 고인들이 보이지 않고, 이후로 오는 이들을 볼 수 없으니 그저 하늘과 땅의 아득함을 그리며 홀로 처량하게 눈물을 흘릴 뿐이다


중국인의 마음속에 틈을 남겨 두자. 고대의 몇 가지 흔적을 현대에 그대로 남겨, 현대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고대를 가깝게 볼 수 있도록 하자. 폐허는 부끄러운 짓이 아니다. 당연히 그것을 은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은폐에 능하다.


중국 역사에는 비극이 가득하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진정한 비극을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모든 것을 대단원으로 마무리 지어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 만족을 취하려 한다.


단지 굴원(BC343-BC278), 두보, 조설근(1715-1763), 공상임(청대 희곡작가, 1648-1718), 루쉰, 바이셴용(1937- ,중국의 소설가) 등만이 이러한 해피엔딩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폐허를 보존하고 비극을 정화시킴으로써, 진정으로 심오한 문학을 낳을 수 있었다.


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을 것이며,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 덮힌 봉우리가 위대한 것은 도처에 등산가의 유체가 묻혀 있기 때문이며, 바다가 위대한 것은 역시 곳곳에 파손된 배의 잔해가 떠다니기 때문이다. 달 착륙이 위대한 것은 “첼리저 호”가 실패했기 때문이며, 인생이 위대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백발과 필연적인 결별 그리고 영원한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중해를 앞에 두고 끊임없이 저 피안을 향해 거친 파도를 헤쳐나간 용사들이 있었기에 영원히 빛나는 그리스 비극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솔직하게 투쟁 끝의 실패를, 성공 후의 상실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들은 더욱 침착해질 수 있다. 중국인들이 더욱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더 이상 모든 폐허를 내몰아서는 안 된다.


폐허로 남아 있음은 현대인들의 문명을 상징한다.


폐허는 현대인들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환하게 비춰 준다.


폐허는 시가지를 가로막는 것도 아니고 전진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인은 깊은 안목으로 자신들이 지금 역사의 몇 번째 계단에 서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다른 곳보다 높은 대(臺)에 서 있다고 헛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전후의 모든 계단을 살필 수 있다.


현대의 역사나 철학은 폐허를 변화시킨다. 또한 역사와 철학 역시 폐허 속에서 소재를 찾는다. 현대의 번잡하고 시끄러운 와중에 비로소 폐허의 고요함이 힘을 얻게 되며, 현대인의 깊은 사유 속에서 폐허는 비로소 우언(寓言)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고대의 폐허는 진정 현대를 세우는 재료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는 한 토막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는 관용이고, 현대는 기개이며, 현재는 광활함이며, 현대는 광대함이다.


우리는 폐허를 옆에 끼고 현대를 향해 나아간다. “


 


답사 마지막 날, 석양이 무겁게 내려앉은 칭다오의 저녁, 중국 내 전통풍물시장 한 군데를 둘러보았다. 방송에서나 보았던 기이한 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바퀴벌레, 전갈, 지네, 각종 곤충 등 혐오스러운 음식들은 다 모아 놓은 것 같았고 선뜻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윤재필 자문위원께서 꼬물거리는 듯한 알 수 없는 벌레튀김을 한 꼬치를 사서 주었다. 순간 꺼림칙했으나 유년시절 소먹이를 하러 다니면서 친구들과 메뚜기, 개구리, 뱀 등을 잡아 장작불에 구워 먹던 실력을 발휘하여 먹을 수 있었고 차량으로 돌아 와 이 사실을 애기하자 신승희 회원 등 몇몇 회원님들께서 인상을 쓰면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 까지 먹을 수 있느냐”고 놀려 대는데 속으로는 재미있으면서도 유쾌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칭다오 최대 번화가에 가 보았다. 모두들 지쳐 있어 차량을 타고 가면서 주마간산 격으로 보았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 왔는데 한국의 인기 요리 전문가인 “백종원”씨가 중국에까지 사업 수완을 뻗쳐 가게입구에 중국인들이 북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사람의 능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음식 하나로 중국에 까지 진출하여 돈을 벌고 있다니 아무튼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답사 마지막 날 밤이다.


시간이 자정이 넘었는데도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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