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서 인생의 궁극을 배우다
물은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하다,
하지만 물은 가장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인간이 사는 지구상에 아무리 산이 많고 높다고 해도
물의 힘에 견줄 수는 없다.
일찍이 철학자 탈레스는 말했던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노자는 말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고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태초의 생명체는 물에서 나오고, 사람도 어머니의 양수에서
생명을 시작한다.
먼 옛날 유년시절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소를 몰고 삼강(낙동강 상류지역으로
예천군,문경군, 상주군의 경계선상을 흐르면서 합류되는 지점)이
흐르는 영순강 변으로 나가 소의 목에 고삐를 감아 놓고 하루
종일 물속에서 헤엄치고 놀던 기억이 난다.
아무 먹을 것이 없어 떡개구리, 뱀을 잡아 장작불에 구워먹으면
서도 행여 뱀에는 벌레가 많아 위험하다고 하여 까맣게 탈 정도
로 구워먹던 기억이 난다. 물가에 도열한 버드나무들의 연초록
잎이 짙어지면 봄이 오고 더위가 찾아오는 줄 알았다.
물은 항상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고 시시때때로 요동치는
내 마음을 받아 냈던가, 그땐 몰랐다 왜 물이 그곳에 머무르는
지를 ......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니 불투명하게나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물은 고요한 듯하지만 끊임없이 운동의 역학으로 움직인다.
고요하되 움직임을 그치는 법이 없다. 물은 낮고 고요하고
부드러운데...... 낮아서 겸손하고, 부드러워서 완고함을 이긴다.
그래서 물과 같이 살면 된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요
마음 편한 것이고 성공하는 가장 최적의 방법이다.
우리는 물을 경전으로 삼으며 지치지 않고 물과 닮고자
하면 된다. 그러면 불만이 없어지고 남과 시비하는 일도
없어진다. 인생의 번잡스러움이 없어지고 청고해 진다.
맹자는 물을 관조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항상 물결을 보라 해와 달이 빛날 때 그 광채가 항상 그
물결을 비출 것이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수만의
물비늘들은 장엄하다. 그 물비늘의 하염없는 반짝임은 무슨
영약과 같아서 우울증 따위는 단박에 날려 버린다.
허나 물이 항상 고요한 것은 아니다. 여름 장대비가 내린 뒤
하천은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차고 넘친다. 그 물의 기세는
사납다. 밤새도록 우렛소리를 내며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면 물은 다시 고요로 돌아간다.
물을 우습게 여기다가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같이 놀던 동무들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몇 사람 있을
정도였다.
물의 원리와 인간행위의 원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같은
원리가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합리적으로 지배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공자는 물을 탐구했고, 순자도
물의 여러 가지 형태와 사람의 도덕적 특질 사이의 관계를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물과 인간 행위에 녹아 있는
원리들이 서로 상통한다는 이러한 가정은 유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대철학 서적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 이미지는 어느 특정학파의 기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도가에서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면서 강압적인
힘없이 앞으로 움직여 나가는 물의 특징을 “무위”로 묘사하고
있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더 물을 좋아했다.
강가에서 “물이여, 물이여” 라고 감탄하곤 했다.
모든 흘러 지나감이 이와 같지 않는가 ?
밤낮없이 결코 그 흐름을 중단하지 않는구나 !
공자가 물을 그토록 좋아하자 어느 날 제자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왜 그렇게 물 앞에 설 때마다 감탄을 하십니까 ?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든 곳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그래서 모든 것에 생명을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은 德과 같다, 끝없이 아래로
흐르면서 꾸불꾸불 돌지만 항상 같은 원리를 따르는 물의
흐름은 義와 같다. 솟아 올라 결코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은
道와 같다. 수로가 있어 물을 인도하는 곳에서 듣는 그 물소
리는 메아리치는 울음소리 같고, 백 길의 계곡을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은 마치 龍과 같다. 수평을 재는 자로 쓸 때의
물은 마치 法과 같다. 아울러 공자는 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
고 했다. 그리고 중국 지식인의 사상의 은사로 일컬어지는
리쩌허우는 이것을 사람이 자연에 동화됨의 뜻으로 이해한다.
나는 때론 도시의 소란함과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사람들을
떠나 물소리와 더불어 고요한 가운데 명상하고 산책으로
일과를 삶는 조촐한 삶을 꿈꾸어 왔다. 그래서 내 안으로
끝없이 침잠하면서 나의 마음을 담은 진솔한 인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남기고 싶다. 비록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참회의 글이라도 말이다.
사람의 몸은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없다면
생명도 존재할 수가 없다. 물은 생명의 본질이다.
물은 땅의 피요 氣이다. 마치 혈맥과 근육을 통하는 길 같은
것이다.
사막에서 식물이 자라지 않는 것은 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일찍이 동양의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회귀하여 솟아나는 물에서 생명의 본질을
통찰하고, 물을 그들의 형이상학적 숙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공자도, 맹자도, 노자와 장자도 그랬다. 도는 맑은 물처럼
고요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물은 정형을 취하지 않고 항상 無爲에서 노닌다.
물은 형태를 갖지 않고, 담기는 그릇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원천에서 솟아나 흐르되 수시로 변화하면서 형태에 고착되지
않는 유연한 성질과 놀라운 융통성을 가졌다. 이 변화에
능한 형질로 모든 생명체에 고루 스미고 적셔 작용하면서도
물은 자유롭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되
인위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무엇인가를 한다. 물은 남성성 보다는 여성성에 가깝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에 스미고
섞이되 다투지 않는다. 그러나 불은 높은 곳을 지향하며
세력을 차지하기 위해 만물과 싸우고 정복하려고 든다.
물은 순응하고 포용하는 여성이고, 불은 열혈기질로
사납게 다투는 남성이다.
노자는 여성은 고요함으로써 남성을 이긴다.
여성은 낮은 위치를 택하기에 합당한 것은 그가 고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여성은 새 생명을 낳고 길러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남성은 만물 위에 군림하며 스스로를 고갈시킨다.
여성이 남성을 이기는 것은 여성이 더 물의 속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의 속성을 가진 여성은 생명의 근원이고
배양자이며 경청자라면, 불의 속성을 가진 남성은 지배자이고
포식자이며 항상 떠도는 자이다.
식물이 발아하고 성장하는 데 물이 작용하고, 그것을 번성하게
하는 데는 태양이 필요하다. 두 성질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만물이 상생한다. 그 균형이 깨지면 세상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시끄러워진다.
물은 자정하여 맑아지는 성질이 있다. 흙탕물도 흔들지 않고
고요 속에 그냥 놔두면 서서히 맑아진다.
동요하지 않음으로 맑아지는 것은 사람이 배워야 할 물의
덕성이다.
물은 저를 막는 장애물을 만나면 그것과 싸우지 않고 그것을
감싸고 에둘러 나간다. 물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만물에
자양분을 베풀되 만물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물은
거의 도에 가깝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생명의 싹들이
돋는다. 이러한 것도 아직 잘 모르고 있던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이러한 점에서 우린 물을 우리의
참 스승으로 받들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이러한 인식은 “체념”과 ‘용기없음’이 아니라 “수용”이다
받아들인 후에 비로소 “솔직한 다음”을 기약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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