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음악의 완성)
모차르트와 동 시대인이었던 하이든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쳐 작곡가의 길을 걸었지만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형식과 내용,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실현하려는 고전주의의
이상은 전체적인 조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형식으로 소나타와 화성음악 등이 발달했는데
위 두 사람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바흐와 헨델의 바로크 시대에는 하나의 악곡에는 하나의 주제만 표현하는 단일 주체성이
특징이었지만 서로 다른 것의 조화를 추구하는 고전파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를 두고
재미와 다양함을 추구했다. 즉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자진 세 부분 -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 이 각각 완결성을 갖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통일을 추구한
것입니다. 대개 제시부는 밝고 빠른 느낌으로 연주되다가 전개부에서는 차분하고
느린 곡조로 바뀌고, 다시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의 밝은 느낌으로 돌아갑니다.
소나타 형식은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의 바탕이 되는 형식으로 고전주의 음악을
대표하게 되었고, 이 소나타 형식의 완성을 통해 서양음악은 그야말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봉건제도의 몰락과 교회음악 중심의 퇴조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음악 또한 조화와 통일을 중시하는 합리성과 조화를 추구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바로크 시대에 유행하던 복잡한 대위법을 버리고, 주 멜로디에
화음 반주를 넣고 조화를 이루는 음악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만든 음악은
화음 즉 화성으로 만들었다 하여 화성음악이라고 불렀는데 바로크 시대의 다성음악과
달리 주된 멜로디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교향곡은 다악장 형식의 관현악곡인데 원래 신포니아 라는 것은 오페라,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 여러 곡으로 이루어진 성악곡을 연주하기 전에 순수한 기악곡으로
연주하던 것이었는데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독립적인 다악장의 곡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고 이 음악적 성과는 아무래도 모차르트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비참한 종말)
모차르트는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천성이 있었다.
한때 찰츠부르크 궁정 음악단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기도 했지만 궁정이나 귀족
밑에서 하인처럼 다루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곳을 나와서 독립된 음악가로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차르트는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등 매우 다양한 장르의 곡을 수없이 작곡했고 그의 음악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빈으로 나와 자유인이 된 이후 모차르트는 오페라 “후궁탈출”과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했습니다. 이즈음 모차르트는 고전주의 정신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고전파 음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이 시기 모차르트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꾸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는데 타락한 귀족들을
비웃는 내용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조반니” 같은 작품은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이 두 작품은 이후에 만들어진 “마술피리”와 함께 모차르트의 “3대 오페라”로 꼽힙니다.
그러나 당시 왕실과 귀족들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것은 좋았으나 고정적인
수입을 잃는 바람에 극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겼게 되었다.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등을 발표하고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모두 탕진하고 말았다. 워낙 순수하고 경제적인 관념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
“콘스탄체”마저 낭비벽이 심했기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의
결혼 때문에 인연마저 끊었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는 상심에 젖은 나머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을 놓지 않았다.
모차르트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교향곡 제39번”, “교향곡 제40번”, “교향곡 제41번”
도 모든 예술분야가 그랬듯이 이 고난의 시기에 작곡되었다.
죽음을 앞둔 그해 그는 오페라 “마술피리”를 작곡했고 눈을 감기 직전까지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 “레퀴엠”도 작곡하였다. 악성 베토벤도 천재 모차르트가 없었다면 그토록
영혼을 울리는 곡들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음악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토벤 자신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매료되어 영감을 받아 음악의 깊이가 심화되기 시작
하였고 특히 베토벤이 사랑하였던 곡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였으며, 피아노협주곡
c단조(k.491)를 듣고는 "인류는 다시는 이러한 곡을 작곡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한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베토벤 자신이 모차르트의 벽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한동안 이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다.
1791년,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인류 최고의 천재 음악가가 가는 마지막 길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했다.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을 만큼 가난했던 탓에 모차르트의 주검은 묘비 하나 없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쓸쓸하게 묻히고 말았으니 ......
(다음 회에는 베토벤에 대한 재미있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소설가 로맹 롤랑는 말했다, 만약 하느님이 인류에게 범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 귀를 빼앗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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