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크리스토프” 라는 소설을 쓴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장자인 로맹 롤랑은
“만약 하느님이 인류에게 범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 귀를 빼앗아
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그는 "베토벤과 괴테"를 주제로 한 소설을
쓰면서 베토벤을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은 인간의 세속적인 소리를 듣지 말고 오로지 신의 음성만 듣고 이를
인간에게 전달해야 할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라고...
1827년 베토벤의 운명 직후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극작가 겸 시인인 "그릴파르처"는
추도사에서 베토벤을 이렇게 추모했다.
“우리는 전 독일과 독일 민족을 대표하여, 이제는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의 완전한
영적 만개로서 높이 추앙받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노라, 독일 운문의 영웅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의 삶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최후의 거장이며,
영혼이 담긴 협화음의 오르간이며, 헨델과 바흐, 그리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불멸의 명성의 계승자이고 동시에 증폭자였다. 이제 그는 가고 없으니 우리는 여기
서서 침묵하는 운명의 끊어진 현을 애도하노라, 잠잠해진 하프여, 그를 이렇게
부르게 해 다오.....“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에서 태어나서 1827년 사망하기 까지 평생 독신으
로 지내면서 온갖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은 성악가로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고 일찍이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재혼한 어머니 마리아와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알콜 중독, 성병,
결핵 등으로 사망하고 어머니마저 베토벤의 나이 17세 때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베토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불우하고도 우울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요한의 혹독한 교육과 어머니 마리아의 심한 우울증이
베토벤 유년기의 일상이었고 이것이 훗날 베토벤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초등학교 급우였던 “부러처”는 다음과 같은 회상을 한 적이 있다
“내 급우 중에 베토벤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궁정 가수였고, 어머니는 사망하였다는데 그는 늘 세수를 하지 않았는지 더럽고 태만하며 단정치 못했으며 천재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음악공부만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라고
또다른 친구 “뮬러”는 “베토벤은 부끄러움이 많고 과묵한 소년으로, 말하는 것
보다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과 시에 푹 빠져 지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세실리아” 라는 여자 친구는 베토벤을 회상하면서 “그는 언제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항상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무엇을 물어보아도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항상 우수에 젖은 사람 같았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베토벤의 음악 인생을 크게 구분해서 보면 태어나서 자란 “본 시절”과 음악적
완성도를 보인 “비엔나 시절”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구체적 음악의 내용을 들먹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베토벤이라는 한 위대한 음악가의 주변에 얽힌 이야기를 순리적으로 풀어가면서
접근하여 그에 대한 애정을 깊게 하고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선배 바흐나 헨델의 음악에 존경심
을 나타냈고, 모차르트의 음악에 영감을 받아 신앙처럼 숭상하였고, 스승인 하이든
과는 스승과 제자로서뿐만 아니라 끝없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스승으로는 하이든 외에 네페 라는 음악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 선배들의 음악을 디딤돌로 하여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면서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 낭만파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스승이었던 “네페‘의 재미있는 증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아버지 요한의 음악적 영역을
넘어섰기에 더 이상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어 나에게로 왔으나 나 역시
몇 년 지나지 않아 나의 음악적 영역을 뛰어 넘어 더 이상 가르칠 수 있는 상황
이 아니었다, 그래서 베토벤을 가르칠 수 있는 음악가는 모차르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차르트를 만나게 하기 위하여 베토벤을 비엔나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운명은 두 천재의 만남을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여기서 두 천재 베토벤과 모짜르트의 운명적 만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787년 베토벤은 네페의 주선으로 비엔나 여행을 하였다.
여기에서 베토벤 일생일대의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모차르트와의
만남이었다.
이 당시 모차르트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때인데 “돈 조반니”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고, 모차르트는 한참 후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쳐 보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17세의 베토벤이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을 본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특별히 연습된 곡이라고 생각하여 다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 이 느낌을 눈치
챈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즉흥곡을 위한 주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 중이던 “돈 조반니” 중의 일부 주제를 주었다. 이 주제에
의한 베토벤의 즉흥곡을 들으면서 모차르트의 관심은 점차 고조되어 갔다.
급기야는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저 젊은이를 눈여겨 보라, 저 젊은이는 머지않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베토벤의 제자이면서 피아노 교본을 만든 “체르니‘
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만남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피상적이긴 하지만 베토벤이 모차르트로부터 몇 시간의 교습을 받았고, 모차르트는 자신의 연주를 베토벤에게 들려주면서 지도해 주는 것을 보았다 “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 후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질투인지 두 천재 작곡자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두 천재의 만남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모차르트가 20년만 더 살아 있으면서 음악적 조우를 할 수 있었다면 인류 음악사에 또 다른 신기원을 이룩하는 쾌거가
있었을 것으로 후세 음악가들은 확신하는 것이다.
베토벤의 출생연도에 대하여 또다른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베토벤 자신도 자신의 나이 40세가 될 때까지 1772년도에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 요한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시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심에서 유래된 것으로 아버지 요한이 8세 된 베토벤의 나이를 6세라고 허위 광고하여 그 나이에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하였다는
것을 그러니까 모차르트보다 어린 나이에 연주를 하는 등 재능을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실제 나이보다 일부러 두 살 어리게 광고를 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그렇게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베토벤보다 14살 대선배인 모차르트가 당시 유럽 사회의 음악을 지배하다시피 하였고
모든 음악가들이 그가 작곡한 오페라 등을 연주하였고 그를 멘토로 추앙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모차르트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고 베토벤은 57세까지 생존하면서 바흐나 헨델,
모차르트 음악의 계승자이며 증폭자로서 그만의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면서 낭만파 음악을 도래케 했던 것이다. - 베토벤 2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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