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코너 (박완서의 밥)
이름     김춘근 날짜     2015-03-31 12:21:26 조회     6205


박완서의 밥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봐, 계셔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작가 박완서(1931-2011)는 남편과 외아들을


잃고 하늘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남편은 병으로 잃었지만 25년 5개월간 자랑스럽게 키워온 의사 아들이 사고


로 창졸간에 떠난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천주교에 입교한 4년째였던


작가는 작품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참척의 고통을 처절하게 기록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 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인생의 반려를 잃은 울


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


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그 무엇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도대체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거부였다.


보다 못한 큰딸이 어머니를 자기 집이 있는 부산으로 모셨다.


그러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이는 수영만에선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었다.


그 또한 못견딜 일이었다.


이해인 수녀가 작가에게 인근 수녀원에서 지내기를 권했다.


수녀원에 간 그녀는 “주님과 한판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다”고 적었다.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말씀 해


보라고 애원하리라“


 


그러나 신의 “한말씀”은 들여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그게 또 참담했다.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펐고 목 놓아 울게 만들었던 것이


다.


하지만 작가는 밥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의 막내딸집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본당 신부에게 인사를 드리


러 갔다가 탁자 위 백자 필통에 적힌 “밥이 되어라”는 글귀를 보고 수녀원


에서 맡은 밥 냄새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토록 간구했던 절대자의 “한말씀”을 깨닫는다.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


답으로....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극복은 아니었다.


근 20년이 지난 후 작가는 이해인 수녀와의 대담집에서 “아픔을 어떻게 극복했느냐 고
 
묻는게 참 싫었다”.고 말했다. 아픔은, 슬픔은 절대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견디며 사는 거죠.

오히려 남편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좋은 추억이 홀로 서는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거죠.



* 본 글은 몇해 전 고인이 되신 작가 박완서의 고백을 그대로 옮긴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님의 글입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천붕), 아들을 잃은 슬픔(참척)을 고백하는 작가의 
  선혈이 낭자한 글입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겠지만
  이 글을 통하여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위안과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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