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코너 (蛙利鷺 와이로)의 유래
이름     김춘근 날짜     2015-04-29 14:36:32 조회     7093



蛙利鷺(와이로)의 유래 


有我無蛙人生之恨(유아무와인생지한) 


위 글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뇌물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와이로를 썼다. 쓴다 등

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위 글의 한자풀이는 “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란

뜻이다.
 


고려 말 최씨 무신정권 때의 학자요 13세기 한국문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동국이상국집”

의 작가 이규보(1168-1241) 선생께서 몇 번의 과거에 낙방하고 초야에 묻혀 살 때 자신의 집

대문에 붙여 놓았던 글이다.


  (이 글에 대한 유래)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요행히 민가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런데 그 집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하였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지식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것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주막에 들려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고 주모에게 외딴집(이규보의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나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 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은 안 오고해서 면담을


신청했다. 그래서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유아무와인생지한(나는 있으나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옛날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꾀꼬리


한테 내가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를 하자”는 거였다.


두루미를 심판으로 하고서....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 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시합을 제의하다니,


하지만 월등한 노래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하고 자루 하나


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로 돌아 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두루미한테 갔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다.


 


약속한 3일이 되어서 꾀꼬리와 까마귀는 노래를 한곡 씩 부르고 심판인


두루미의 판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결국 심판인 두루미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말은, 이규보 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이규보 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그의 실력이나 지식은 어디 내놔도 안 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거다.


돈이 없고, 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은, 노래를 잘 하는 꾀꼬리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는 두루미한테 상납한


개구리 같은 뒷거래가 없었기에 번번히 낙방하여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하기에,


자신도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


과거가 있다 해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이라도 거짓말을 하고 궁궐에 들어와


임시과거를 열 것을 명하였다 한다.


과거를 보는 날,


이규보 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 걸은 시제가 (유아무와인생지한)이란 여덟 자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 절을 한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서


장원급제하여 차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蛙利鷺라는 말도 이때부터 유래 된 순수한 우리 말인 것이다.  




이규보를 일명 백운거사라고 하며,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고.

우리나라 최대작가를 일컬을 때 일반적으로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이규보, 조선은 박지원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의 유명한 시가 전해오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山僧貪月光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甁汲一壺中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到寺方應覺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甁傾月亦空


‘영정중월(詠井中月)’ 곧 샘 속의 달을 노래한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시이다.



어렵지 않은 글자만 가지고도 정확히 운을 맞추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달빛을 사랑하는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충분히 실천한 분이련만,

그조차 욕심이요,

병 속의 가득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지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절묘한 표현이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이니,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이규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시대적 배경이 무신정권하에 태어난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논쟁의 한 단면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평가는 각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되 제 먹을 것

챙기기는 재빨랐던 이가 있었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계와 이중성을
 
꿰뚫어 보았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야유이기도 했다.



이규보는 그만의 길을 걸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 사상에 심취했다.

그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모습은 25세 때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같은 작품에 드러난다.

이때는 지방을 돌다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할 때였다. 우리 역사에 대한 지극한

자긍심과 함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한 결과였다. 특히 [동명왕편]은

민족 영웅 서사시로 오늘날의 평가 또한 극진하다.


 


입신양명의 길로 나가 한 바탕 풍운의 시기가 지난 다음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하였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방향을 잡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으며,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런 그를 최충헌이 알아보고

등용한 것은 이규보의 32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는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최충헌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최이가

정권을 물려받은 다음에는 더욱 총애를 받아,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

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

事)를 지냈다.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복직되었고, 1237년에는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 벼

슬이다.



이런 그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처신에서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970~80년대의 대표적인
 
논객인 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지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한마디로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평가이다.


그에 반대되는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국문학자 조동일의 평가이다.





김윤희 재미있고 유익한 글 좋습니다   (20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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