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한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무언가 생각한 바를 정리해보고 싶어 글로 남깁니다.
저는 종교를 아직 가지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교의 존재가치와 교리를 존중하는
한 사람입니다. 아직 깨닫지 못하고 영생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아마 아직은 한 종교에 귀의하기 보다는 자아와 이성이 더 강한 모양
입니다. 다만 존경하는 향토사회원 여러분과 의견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종교 논쟁의 시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임을 밝혀둡니다.
삶을 수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고생이나 눈물이 나도 그렇게 힘들지 않고 삶 자체가 행복해 진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그것이 내 삶에서 어차피 짊어져야할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속에 내 주변 그러니까
내 가정, 내 이웃, 내 직장, 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니고 성당에 다니고 절에 왔다갔다고만 한다고 믿음이 생기고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 볼 줄 알아야 한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다, 어찌 보면 불교든, 크리스트교이던 수행은 깨달음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의미에선 같은 것이다
깨달음은 눈을 떠는 것이다.
눈을 뜨면 은혜 아닌 것이 없고 축복 아닌 것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느냐고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또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내려 놓아야 한다. 성냄도 부끄러움도 비교의식도 자존심도 진정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나라가 보이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역공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용을 좋아해서 온 집안에 용을 장치하고 그려 놓고는 빌었는데 정작 용이 나타나서
꼬리만 살짝 보였는데도 도망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진정 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용의 허상을 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를 질 일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 중에 나를 따르려는 자는 평생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하고 따라오
라고 했다. 이 말은 무엇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제각각의 십자가가 있는 것이랍니다.
크고 작고 할 뿐이지.... 자신이 십자가를 질 상황이 되면 그것은 지고 갈 생각은 안하
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나에게만 왜 이러한 고통을 주느냐고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것은 참 종교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참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십자가의 믿음을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소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주여, 저에게 작은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곤란함과 고통을 통하여 아름다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형체도 없다. 마음으로 바라봐야한다.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다. 깨달아야 보인다. 하느님의
나라는...
새로 나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자아를 버려야 한다.
죽어야 한다. 묵은 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으로 화두를 준다.
이 화두는 정답이 없다.
창고 안에 보물이 가득한데 그 보물을 혼자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수 십 개의 빗장을 풀어서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미치지 않고서는 그 화두를 깨칠 수가 없다.
미친개가 호랑이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미치지 않고서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가 없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큰아들과 작은 아들... 탕자인 작은 아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주면서 반겨준다.
왜 그랬을까요 ? 그 작은 아들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온갖 경험을 통하여 부모님이
사는 집이 얼마나 안락하고 좋은 곳인지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법당 벽에 가면 심우도가 있다.
깨달음의 과정을 열 단계로 나누어서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본심을 바라보고 정직한 것을 바라다보면 누구나 부처가 보인다는 말이다.
1. 동자가 고삐를 들고 소를 찾고 있는 장면
2. 발자국을 발견하고 찾는 장면
3. 소를 찾은 장면
4. 길들이는 장면 등..........
연기의 본성은 공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이다. 공은 모든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만물이 내 몸이고 내 집인데 뭐 그리 욕심을 부리고 집착을 하느냐
그리고 깨달았으면 저자거리에 나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교화시켜야 한다.
깨치고 나면 불청객을 짊어지는 것 보다(즉 십자가를 지는 것)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교회와 성당과 절에 갈 수도 있지만 꼭 그곳에 가야만이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속에 내 주변 그러니까
내 가정, 내 이웃, 내 직장, 내 사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고 싶다
삶을 수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고생이나 눈물이 나도 그렇게 힘들지 않고 삶 자체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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