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축배를 위하여
가을인가 했는데 어느 듯 晩秋
제법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남망산 공원에 세워진 詩碑 앞에서 바다를 보았다
멀리 국제음악당이 보인다
흰구름 속에 미륵산 케이블카도 아스라이 보인다
산다는 것이 간이 맞지 않으면 나는 홀로 들녘으로 바다로 정처
없이 발길을 돌리는 습성이 있다.
그래도 허전함이 밀려오면 가끔 배를 타고 욕지도로 간다
거기서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욕지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홀로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루 종일 나 자신을 내버려 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욕지도 끝자락 통단지구 끝 절벽까지 가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곧은 자세로 선다
멀리 신비의 섬 국도만 보일뿐 보이는 건 수평선뿐이다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로 떨어지면 죽음이다.
정신이 번쩍 든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 진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파도는 천 번 만 번 바위를 때리고 물거품을 남긴 채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곳은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별천지 절벽의 바위,
오직 망망대해와 수직 절벽의 바위뿐,
그 틈바구니에 한 두 사람 드러누워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이 나의 쉼터가 되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곳을 혼자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
딱히 이유는 없다.
괜히 혼자 있고 싶다 그리고 무언가에 골몰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고 기분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이상한 취향의 사람이라고 해도 난 행복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산다는 것이 힘들고 허무할 때도 찾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간사한 인간의 마음의
장난임을 알고 있다.
살다보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온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도피처를 찾는다.
그 최종 도피처는 죽음이다.
라즈니쉬는 "죽음은 삶의 절정이자 마지막에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죽음에서 전체로서의 삶은 응축된다"고 했던가 !
그러나 난 결코 죽을 용기도,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짓도
하지 않는다. 행복은 언제나 고뇌의 언덕너머에 미소 짓고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에 ......
추도도 가 보았다.
좋은 섬이다,
터덜 터덜 혼자서 사색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인 섬이다.
주위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멀리 남해, 사량도, 욕지도 한려수도의 절경이
그림같이 널려있다. 그러나 며칠을 견디기 힘들었다.
혼자선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혼자이길 원했다. 그때는 몰랐었다.
어리석게도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앞길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절벽을느낀다.
그럴 때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 다시 다짐한다.
너만 그런 것이냐고, 너만 달팽이의 껍질을 덮어 쓴 것이냐고.....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느끼며 다시 삶에의 열정을 불태운다.
인간은 자유로운 삶의 어두운 부분까지도 내 몫이기에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언젠가 쓴 글이 생각난다
“인생은 낙엽처럼 슬픔과 외로움을 간직한 채 떠나야 하는 나그네,
내 어이 오늘날과 같은 나그네의 밤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아 ! 목 놓아 울고 싶은 이 밤
밤안개가 흘러가는 미로 속으로 가야 할 이 나그네를 두고 이렇게 마냥 흘러만 가는가 !“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롤랑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이란 15분 늦게 입장한 영화관 같은 것”이라고
그렇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하여 몰입하게
되는 것이고 신앙을 가지기도 하고 철학에 깊이 매달리기도 하는것이 아닐까!
갑자기 나훈아의 “공”이란 노래를 불러 본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인생의 의미를 담은 깊이 있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어둠이 짙어지는 美港 통영,
어선들의 피곤한 귀향을 알리는 뱃고동소리,
강구 岸을 밝힌 형형색색의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인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진부한
話頭를 붙잡고 그 의미 규정에 몰입하는 나 자신이 약간은 처량해 보인다.
로망롤랭의 말처럼, 나훈아의 노래처럼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인생인데.....
그렇다 불가사의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맡은 바 소임을
다 하는 사람,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정직한 사람들이 있기에 보존되고
발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해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좋은 배를 만드는 것은 뛰어난 기술이 아니라 바다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아 헤메고 사람을 이해하는 삶의 열정이 충만해
있기를 열망해 본다.
어리석은 인간이 무한한 세월을 쪼개 유한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시간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만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은 창세 이래 역사 속에서 찰나에 불과한것,
인간이 신에게 대적하고자 세웠다는 바벨탑,
그것마저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할지 모른다.
인간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자신을 반추해 볼 때 과연 내가 얼마나 순수한 열정
으로 정직하게 이 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헌신해 왔느냐를 스스
로에게 물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일류의 반열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의선사의 고백이 가슴을 친다
"끝없는 수행을 해 왔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고
도를 깨칠려고 아무리 쪼그리고 앉아 있어도 온갖 잡생각만 맴돌 뿐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
나이 들어서 진정 참을 수 없도록 괴로운 것은 죽음도 돈도 학식도
명예도 아니더라. 자기 자신을 진정 용서할 수 없을 때" 라는 그의 체험적 수기.
이쯤에서 인생의 답을 어렴풋이나마 유추해 본다.
요즈음 부쩍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 우리 모두의 것이고 공동체의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카아네기가 말했던가, 부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존경할만한
일이지만 부자인 채로 죽는 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런 저급의 못난 사람은 되지 말자 다짐해 본다.
생의 마지막 정점까지 활화산처럼 타올라 모든 것 소진한 채 노을처럼 사라지는
장관을 연출하고 싶다......
평소 마음 속에 기억되고 있던 수많은 생각과 고뇌의 삶을 살다간 선각자들의
삶이 생각난다
어두워진 남망산 공원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발길이
오늘따라 무겁지만은 않다.
깊어가는 가을 조용한 찻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할 삶의 동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그립다.
아름다운 인간들이여 !
아름다운 인생을 위하여 축배의 잔을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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