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백월 이성(南白月 二聖),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1. 개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 탑상(塔像, 탑과 불상을 만든 이야기) 편의 이야기로 삼국유사에서는 <백월산 양성 성도기(白月山 兩聖 成道記)>에 기록된 얘기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내용은 창원 백월산 근처 한 마을의 두 청년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미륵을 꿈꾸며 백월산 북쪽과 동쪽에서 수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한 젊은 여인이 달달박박의 수도처에 찾아와 하룻밤 지내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했다. 이에 노힐부득을 찾아 간청하니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라면서 유숙을 허락하여 도와주었더니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다. 그날 밤 부득은 미륵존이 되었다.
이튿날 부득을 찾은 박박도 부득의 인도로 무량수가 되어 두 부처가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구경하자 두 부처는 불경의 요지를 말하고 구름을 밟고 사라졌다. 신라 경덕왕이 이 소문을 듣고 백월사 남사를 창건하여 미륵상과 아미타상 두 부처를 모셨다고 한다.
2. 삼국유사의 기록 요약(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단원 구분하였음)
(1) 백월산 이야기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백월산이란 이름은 구전으로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못을 하나 팠는데, 보름 때면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시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 그러자 못 가운데에 나타나던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2)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이니 아버지는 월장(月藏),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한 사람은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는 수범(修梵),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정신을 수련함)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 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던 중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라는 생각에 인간 세상을 떠나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3) 부득과 박박의 수도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감탄하여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박박(朴朴)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에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夫得)은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여 방을 만들어 뇌방(磊房)이라고 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 부득과 박박의 득도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에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박박이 있는 북암(北庵)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낭자(娘子)는 부득이 있는 남암(南庵)으로 가서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이 "그대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묻자 낭자는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불경에 나오는 싯귀)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夫得)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라면서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고요히 염불하는데 밤이 새려 할 때 낭자가 부득을 불렀다. "내가 산고(産故)가 있으니 짚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라고 말한 후 여인이 사라졌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부처님을 만났으나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한 후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4) 백월산 남사 창건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5) 이 이야기의 논평
삼국유사에 이런 논평을 기록했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6) 찬양문<삼국유사에 기록된 찬하는 글>
ㅇ 북암을 찬하는 글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ㅇ 남암을 찬하는 글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ㅇ 성랑(聖娘)을 찬(讚)하는 글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두고 서쪽으로 갔네.
ㅇ 이 글은 한글판 삼국유사(리가원, 허경진 옮김, 한양출판, 1996)를 참고하여 읽기 쉽도록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 이 이야기를 토대로 각종 고지도, 향토사료 등을 통하여 다음 장소를 찾아 현재의 위치를 추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1. 백월산 사자암 2.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있었다는 선천촌(仙川村) 3. 선천촌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 4.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의 승도촌(僧道村) 5. 승도촌의 대불전(大佛田)· 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 6. 회진암(懷眞巖) 또는 양사(壤寺)와 유리광사(瑠璃光寺) 7.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8. 북쪽의 사자암(獅子巖)-판방(板房)-북암과 동쪽 고개의 뇌방(磊房)- 남암 9.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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