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레미제라블을 읽고 ......)
이름     김춘근 날짜     2014-10-20 11:57:01 조회     2360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 빅토로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레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 또는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목처럼 이 작품 속에는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평생
죄인의 낙인이 찍혀 살아가는 장발장의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 그려져 있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라브리 마을의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은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고 살아간다. 장발장은 배고픔 끝에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의 선고를 받는데, 남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 나머지 틈만
나면 탈옥을 시도한다. 그래서 최초 빵 한 조각으로 시작된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를 19년 동안이나 옥살이하게 했으며 그 후 처절하고도 냉정하게 사회로
부터 격리되고 버림을 받게 된다.

사람들의 냉대, 피곤한 몸, 피폐해진 영혼........ 그는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 가엾은 영혼을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은수저를 훔쳐 달아났다가 잡혀온 그에게 은촛대까지 내주면서 밀리에르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이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샀소.”
그 후 8년이 지나고 잘발장은 신분을 숨긴 채 “마들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공장 주인으로 성공한다. 그의 공장에 다니는 직공 중에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코제트라는 사생아 딸을 키우는 판틴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다.
딸의 약값을 마련해야 했던 판틴은 목걸이와 머리카락을 팔다가 결국 창녀가 되어
버린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그 후 “마들랜”은 시장으로까지 임명되었으나 자기 대신
장발장으로 오해받고 구속된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하여 자신이 장발장임을
고백한다. 또다시 투옥된 장발장은 배에서 노역하다가 죽어가는 선원을 구하고
바다로 추락한다. 다음날 신문에는 장발장이라는 죄수가 선원 한 명을 구하고
바다에 익사했다는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장발장은 죽지 않고 나타난다.

다시 부활한 장발장은 창녀 판틴의 딸 코제트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운다 그러나
그녀의 혈관에는 보헤미안의, 그 맨발로 여행을 다니는 모험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비둘기라기보다 종달새였다. 야성적이고 용감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듯 숙녀로 자란 코제트가 마리우스 퐁메르시라는 청년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모든 사랑을 쏟던 장발장은 허망함을 느낀다. 그러나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결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공화파인 마리우스가 프랑스 혁명 중에 시가전에서
부상을 당하자 장발장은 목숨을 걸고 그를 위험에서 구출해 주기까지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머지 죄를 응징하기 위하여 장발장을 집요하게 쫓는 자베르 형사,
장발장은 “법률의 포로”였고, 자베르는 “법률의 노예”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발장에게서 목숨을 구한 자베르는 그를 풀어주고 나서 법에 대한
신념에 깊은 회의를 느낀 나머지 자살하고 만다. 죽으면서 자베르는 말했다
“내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한 저 죄수(장발장)은 복수의 기회가 왔는데도 날
살려주었고 이번에는 내가 그를 용서해주었다”
이것은 왜일까 .......
오직 하나 양심의 사면이 필요할 뿐 이라는 장발장,
평생을 쫓기며 살아야 했고, 두 모습 속에 한 영혼을 담고 살아가야 하는 지독한 짐을
등에 지고 살아야 했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그의 등에 지고 있는 짐보다 타인의 짐을
더 무거워했던 것이다.

니이미 난키치가 쓴 달팽이의 슬픔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자기 등딱지에 슬픔이 가득 차 있는 것을 깨달은 달팽이가 친구를 찾아가
“이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 하면서 등에 지고 있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친구 달팽이가 대답한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등딱지에도
슬픔이 가득하단다. 달팽이는 다른 친구 ,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똑같은 질문을
계속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결국 달팽이는 누구에게나 슬픔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
내 짐만 보이고 남의 짐은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우리는 똑같은 무게의 짐을 등에 지고
가는 달팽이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손 내밀며 함께 동행할 줄 알아야 한다.

위대한 장발장, 슬픈 장발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법정의와 국가


 


레미제라블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주제는 사법정의다. 소설의 주인공 장발장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나뭇가지 치는 일을 했다. 배운 것은 없지만 성실하게 일을 해서 과부가 된 누나와 조카 일곱 명을 잘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어엿한 가장이었다. 나뭇가지 치는 계절에는 하루에 24수를 벌었고, 그런 다음엔 가을 일꾼으로, 잡역부로, 소를 치는 일꾼으로, 육체노동자로 고용되어 열심히 일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팡틴이 도시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장발장은 농촌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장발장은 일거리가 없어서 실업 상태에 빠진다. 집에는 빵이 떨어졌고, 어린 조카들은 굶주림에 떨었다. 이 때 장발장은 이웃 빵집의 유리창을 깨고 팔을 쭉 뻗어서 빵 한 조각을 훔치려다가 붙잡혀서 형무소에 갇힌다. 빵을 한 조각 훔치려 한 것에 불과했지만 가택 침입과 절도죄가 적용돼 5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것이 1795년의 일이었고, 이 때 장발장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 후 장발장은 몇 차례 탈옥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형기가 점점 늘어나 도합 19년을 형무소에서 지낸 후 비로소 석방된다.


장발장의 죄는 엄연히 법적 심판의 대상이다. 빵을 훔친 것은 분별없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가 감옥에 간 사실만으로는 사법적 정의의 문제를 거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이 장발장에게만 있는가? 아니다. 빅토르 위고는 단순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 더 무겁다고 말한다. ‘노동자인 장발장에게 일거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장발장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국가의 큰 과오가 아닌가?’


징벌도 가혹하고 과도했다.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 훔친 행위를 사법적으로 단죄하여 19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장발장을 형무소에 가둔 것은 분명히 사법 당국의 과잉 대응이었다. 범죄인 쪽에서 범행에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 법률 쪽에서 형벌에 더 큰 잘못이 있었다. 균형추가 지나치게 기울었다. 이것은 정의에 어긋난다. 그것은 국가의 잘못이었다. 장발장이 받은 징벌은 부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불공정한 것이었다.


 




권한별 ㅅ8   (201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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