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과 차 종자
이름     김춘근 날짜     2014-10-20 11:47:29 조회     1570

조선조 성리학 도통의 정맥으로 추앙받았던 김종직.

밀양출신으로 그의 자는 계온(季)이고, 호는 점필재( 畢齋)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13년(1431)에 태어난 김종직은 2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3년간 사가독서를 하다가 세조 8년(1462)에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 병마평사(정6품), 이조좌랑, 수찬, 함양군수 등을 거쳐 성종 7년(1476) 선산부사가 되었다. 성종 14년(1483)에는 우부승지(승정원 정3품)에 올랐으며, 이어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절의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맥을 잇다
김종직의 아버지는 고려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밑에서 수학한 김종직도 자연스레 그 학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로써 훗날 사림의 시조로 칭송된 그는 문장과 사학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성종 17년(1486)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동지승람』을 편찬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 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겪으며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단서가 되었던『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지은 것이었다. 이는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의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弔喪)하는 글인데,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면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대의 조정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훈구파의 한 사람이었던 이극돈(李克墩)이 『성종실록』의편찬을 담당하다가 김종직의『조의제문』을발견하였고, 이는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공격, 즉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다. 이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관에서 꺼내 극형에 처하던일)를 당하였고, 그의 제자들 역시 세조에 대한 불충이라는 죄목으로 참수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도학사상의 맥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 이맹전(李孟專), 이종준(李宗準) 등이 그의 제자들이었으며, 중종 때 개혁정치를 단행한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나갔다.

이와 같이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한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의를 드높이고 옳고 그름을 밝히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세조와 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며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이들 역시 스승과 같이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고자 힘썼다. 그 결과 자연히 김종직은 사림 학자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김종직은 중종반정과 함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점필재집』,『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등이 있다.


학문의 깊이만큼 유능한 지방관으로 활약도 두드러졌다.
학문적으로 유명했지만, 김종직은 관리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함양군수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함양군에서는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바쳐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고을에서는 차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차를 바치라는 명이 거두어지지 않았고, 백성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공납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없이 비싼 돈을 주고 사서 바칠 수밖에 없었다.

함양군수로 부임해 온 김종직은 그 폐단을 발견하고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던 그는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고을 함양이 이 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에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하고는, 몸소 여러 늙은이들에게 찾아 가서 물어 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수소문을 한지얼마지나지 않아김종직은 과연암천(巖川) 북쪽 대밭 속에서 차 종자 몇 떨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고을에 차밭을 일구게 하였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차밭은 크게 번성하였다.
부당한 공납 부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을 위해 직접 차 종자를 얻어 폐단을 해결한 것은 관리로서의 그의 유능한 면모를 엿볼수 있는 일화이다.



* 얼마 전 밀양의 영남루에서 밀양에 얽힌 유적지와 역사적인 인물, 박시춘 등 가요사에 얽힌 이야기를 잠시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가로 밀양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종직과 차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올려보았습니다. 현재 전국적인 현상으로 전문커피집이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커피를 마시면서도 조상의 차문화에 얽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욱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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